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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2.0] “뱀파이어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정독도서관이 마련한

박일아 연구원의 ‘뱀파이어와 철학하기’

서울 혜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뱀파이어’를 소재로 ‘선과 악’을 통찰

박일아 한국영상자료원 겸임연구원이 지난 6일 서울 혜화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화 ‘렛미인’을 보며 뱀파이어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백상경제연구원




지난 6일 서울 혜화여자고등학교 학생 50여 명이 온라인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뱀파이어’를 통해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하는 흥미로운 주제의 강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정독도서관이 지역 청소년의 인문학 사고를 높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박일아 한국영상자료원 겸임연구원이 강의를 맡았다.

박 연구원은 “뱀파이어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나요”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 학생들은 “없어요”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슈퍼 히어로가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번쯤 해 볼 수 있지만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를 친구로 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 소년이 뱀파이어와 친구가 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가 있다”며 토머스 알프레드슨(Tomas Alfredson) 감독의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에 대해 설명했다.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John Ajvide Lindqvist)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렛미인’은 뱀파이어 친구를 둔 소년 오스칼의 이야기다.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는 열 두 살 소년 오스칼의 옆집에 어느 날 이엘리라는 소녀가 이사를 온다. 그 둘은 놀이터에서 자주 만나며 서로를 알아간다. 오스칼이 학교 폭력에 시달린다는 것을 눈치챈 이엘리는 오스칼에게 힘이 되어준다. 오스칼과 이엘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우정을 쌓는다. 이엘리가 이사 온 후부터 마을에 기괴한 살인사건들이 끊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오스칼은 이엘리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오스칼은 이엘리를 멀리한다. 오스칼이 위험에 처한 순간에 이엘리가 나타나 구해주면서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 마을을 떠난다.

박 연구원은 “이 영화는 ‘선·악’과 ‘진정한 친구’가 무엇인지 대해 생각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스칼은 사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마음속에 살인의 칼을 품었다”며 “생존을 위해 사람을 죽인 이엘리가 악한가, 분노로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득 찬 오스칼이 악한가”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다. 학생들이 고민에 빠지자 그는 “오스칼과 친해지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며 노력한 뱀파이어 이엘리가 오스칼의 친구인가, 오스칼을 괴롭히는 같은 학급 아이들이 오스칼의 친구인가”라고 물었다. 그의 두 가지 질문에 학생들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박 연구원은 “초기의 영화와 소설 속 뱀파이어는 추하게 생긴 외모에 사람을 해치는 악의 이미지가 강하게 그려졌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웹툰과 소설 속에 등장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며 “사람을 해치는 대신 수혈한 피를 사 먹는가 하면 낮에 활동하기 위해 햇빛 차단 크림을 바르고 양산을 쓰는 뱀파이어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같이 악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졌다”며 “인간과의 공존을 위해 자신들의 행동을 절제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뱀파이어가 단지 인간과 생존 방식이 다르다고 인간보다 악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현대인들은 물음표를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자신과 다르다고 상대를 배척하는 것, 분노에 차 잔혹한 마음을 가진 것 등 우리가 쉽게 하는 행동들이 악한 게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해 학생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자신이 절제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독도서관이 마련한 박 연구원 ‘뱀파이어로 철학하기’ 강좌는 ‘고인돌2.0(고전·인문아카데미2.0: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의 프로그램의 하나로 개최됐다. ‘고인돌2.0’은 서울경제신문 부설 백상경제연구원과 서울시교육청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 2013년부터 함께한 인문학 교육 사업이다. 성인 중심의 인문학 강좌로 시작한 ‘고인돌’은 지난해부터 명칭을 ‘고인돌2.0’으로 바꾸고 서울 전역의 중·고등학교와 연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역사와 건축, 경제, 과학, 미디어 등 다양한 분야의 총 56개 강좌로 구성된 올해 제9기 ‘고인돌2.0’은 특히 교과목과의 연계성을 높여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원격 강의 등 비대면 프로그램도 마련됐다.

혜화여고 2학년 위채연 양은 “뱀파이어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선과 악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며 “인간의 잔혹성과 배타성 같은 우리 안의 악을 먼저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1학년 공서연 양은 “인간과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며 “다른 사람과 어울리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인돌 2.0은 올 11월까지 80여개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들의 인문학의 사고를 높이기 위한 강연을 펼쳐나갈 계획이다. / 이효정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원 hj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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