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을 90여일 앞두고 보수 대통합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20대 총선에 이어 19대 대선과 7대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면서 이번에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면 ‘잃어버린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통합의 진원지다. 이런 가운데 이문열 작가가 보수 진영의 통합을 촉구하는 시민단체 ‘국민통합연대’ 공동대표 5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그의 행보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직업 정치인도 아닌 그가 번잡한 정치판에 명함을 내민 이유가 궁금해 인터뷰를 요청했고 “늙은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며 우회적 승낙을 얻어 지난 14일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을 찾았다. 이 작가가 사재를 들여 마련한 부악문원은 30여년간 머물며 집필활동과 후진 양성을 해온 문학 사숙이다.
이 작가는 이날 3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보수 진영 내부의 획기적인 변화가 없으면 (이번 총선은) 지극히 비관적”이라며 “눈앞의 선거를 위한 통합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이며 강력한 통합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수 진영 내부에서) 처절한 자기반성 없이 무조건 상대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로는 희망이 없다”며 “보수 진영이 전력을 다해 뭉쳐도 될까 말까 한 싸움인데 지금처럼 단결이 되지 않으면 (21대 총선에서도) 득표율 40% 밑으로 떨어지면서 완벽하게 패배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삼권분립 등 민주주의 기본원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민주집중제”라면서 “권위적인 정도가 아니라 전제적·독재적으로 치닫고 있다. 매일매일 불편하고 죽을 맛”이라며 쓴소리를 쏟아냈다.
-최근 들어 정치적 행보가 부쩍 잦아졌는데.
△정치에 관심을 갖고 불편한 말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는다. 작가 생활 40여년 중에서 요즘 같은 기분으로 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답답하다. 군사정부 때보다 지금이 훨씬 답답하고 작가로서도 글 쓰는 게 힘들다.
-얼마 전 국민통합연대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리면서 ‘붓을 던지고 창을 들어야 할 때’라고 했다.
△국운이 기울 때 조선 고종이 안동 지역 지사들에게 내탕금을 보내면서 선비들에게 했던 말을 인용했다. 당시 선비들이 협동학교 형태로 신교육을 하려고 했다가 나중에 신흥무관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은 때가 있어도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난 1년은 글을 전혀 쓰지 못했다. 글을 쓰다가도 써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에 집어치우고는 했다. ‘창을 들고 싸우겠다’에 방점을 찍은 게 아니라 ‘글만 쓰고는 못 있겠다’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보수 대통합이 추진되고 있지만 과정이 순탄하지 않아 보이는데.
△보수 진영 내부에서부터 눈 크게 뜨고 ‘뻘짓’하지 말고 제대로 개혁해야 한다. 형식이나 방식 등 수상쩍고 온당하지 않은 게 참으로 많은데 보수세력 스스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처절하게 반성하고 개혁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지켜보면 참 답답하고 암담하다. 지금도 누구 한 명 책임지고 선거에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이 없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은 뭔가.
△2016년 20대 총선은 질 수 없는 선거였다. 과반은 물론 180석 이상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40%에 가까운 전통적 지지층이 있었고 야권은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으로 분열돼 ‘일여다야’ 구도였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수도권에서 민주당에 완패했고 전통적 텃밭인 영남에서도 고전했다. 가장 큰 문제는 내부의 분열이었다. 친박계가 주도한 공천에 비박계의 반발이 따랐고 옥쇄파동까지 벌어졌다. 당시 공천권을 갖고 장난친 사람들이 이에 대한 책임을 졌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죽어야 할 이들이 하나도 안 죽고 설친 것이다. 게다가 조국 사태로 집권여당이 잠시 수세에 몰리자 우리가 이긴 것처럼 착각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멍청한가. 이런 식으로는 절망적이다. 제일 죄 많은 이들이 가장 큰 소리로 떠들면서 단합을 막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다.
-보수 진영이 변화 속도에 못 따라간다는 지적도 많다.
△(보수 진영이) 미련할 정도로 도전이나 변화에 둔감한 것도 사실이다. 그걸 일부러 무시했던 것은 아닌데 살던 대로 사는 게 편하니까 그냥 살아온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이 어떤 늪 같은 것에 빠져 있는데, 그것을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과소평가했던 것이 보수 진영의 과오라면 과오다. 이제라도 정색을 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목까지 차서 결국 헤쳐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동안 늪의 정체에 대해서는 보수 우파 내부에서도 일치된 인식이 없었지만 문재인 정부 3년을 거치면서 분명한 인식이 생기고 있다.
-우리 사회가 빠져 있다는 늪이 무엇인가.
△민주적 중앙집권주의, 즉 민주집중제 양상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 형태의 이식과 변형이 심하게 일어나고 사회 전 분야가 이상한 변형을 겪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리품으로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온전히 속해야 하는데 미국이 소련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분단체제를 가져왔다. 남과 북은 6·25전쟁을 거치면서 엄혹하게 상대방을 청소했고 지금까지 각기 다른 체제에서 살아오고 있다. 북한에서 이뤄진 자유민주세력에 대한 학살은 그들 나름대로의 청소였고, 남한도 남한 나름의 방식으로 (반대세력을) 청소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남한 내부 구석구석이 늪에 빠져들고 있고 주요 권력지형의 3분의1은 이미 잠식당한 게 아닌가 강하게 의심된다.
-그렇다면 보수의 가치란 무엇을 말하나.
△(앞에 놓인 붉은 펜을 들어 보이며) 이 펜의 끝 부분이 이렇게 뾰족한 것은 불편하고 옳지 않으면 진작에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볼펜으로 쓰인다는 것은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게 과거에도 현재에도 가장 쓸모 있고 편리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제도도 마찬가지 아닌가. 당시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우리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 과거의 선의와 노력을 무턱대고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내가 보수를 언급할 때는 이데올로기보다는 현상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말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가 있고 저마다 세계에 대한 선택과 판단이 있는데 과거나 현재보다 미래가 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쪽이 진보 진영이다. 살아온 세계는 이미 알고 있으니 아직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 진영의 주장이 매력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살다 보면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는 현재가 되는데, 미래에 화려한 발전과 진보만 있고 과거는 잘못됐고 고쳐야 할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개인적 경험으로 봐도 지난 70년 동안 세상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데 그 당시 이 세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무능하고 악했다면 오늘의 이 세계가 나올 수 있었을까. 무턱대고 일방적 진보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세계가 이만큼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과거에 누군가가 수고했을 것이다. 보수는 그런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태도다.
-낡은 보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보수가 할 일은 보수의 진정성을 찾는 것이다. 진보는 너무 선명한 반면 보수는 복합적이고 잡다한 것이 많이 실려 있다. 여러 잡동사니를 실은 배 같다. 그 안에는 누구도 인정하지 못할 보수도 분명히 있다. 보수의 진정성을 위해서는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모두 짊어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겁다. 낡고 큰 배지만 실을 것과 덜어낼 것을 구분해 배의 중량을 줄이고 진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 정치의 현실을 진단한다면.
△맹자가 ‘춘추’를 면밀하게 검토한 후 ‘춘추에 기록된 전쟁 중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춘추무의전·春秋無義戰)’고 했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다른 나라를 공격했던 기록이 많은데 이것은 정벌이 아니라 침략이나 약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는 ‘의(義)’라는 게 없다. 정치적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 강자와 약자의 논리만 있다. 옳고 그름이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힘에 의해 독점되는 아주 비정상적인 구조다. 권위적인 정도가 아니라 전제적·독재적이다. 나는 매일매일 불편하고 죽을 맛이다.
-21대 총선은 어떻게 보는가.
△보수 진영에서는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가치를 내걸고 대통합을 이뤄야 한다. 통합 역시 가까운 선거를 위한 일시적인 전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이고 강력한 통합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 내부에서도 같은 하늘을 이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반목하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 가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처절한 자기반성 없이 상대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로는 희망이 없다. 보수 진영이 전력을 다해 뭉쳐도 될까 말까 한데 지금처럼 단결이 되지 않으면 (득표율이) 40% 밑으로 떨어지면서 완벽하게 패배할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지극히 비관적이다. 국민들이 민주당이 아닌 쪽에 찍을 수 있게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보수 진영의 사명인데 그것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He is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이열이다. 서울대 국어교육학과를 중퇴했으며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서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가작으로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새하곡’ 당선으로 본격 등단했고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상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젊은 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1986~1998)’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시인(1991)’ ‘호모 엑세쿠탄스(2008)’ 등과 평역서인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대한민국문학상·이상문학상·호암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세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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