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창작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는 것은 미술후원이다. 미술가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의뢰하고 사주는 후원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중세에서는 주로 종교적인 작품이 많이 제작됐기 때문에 주요 후원자는 교회나 성직자, 혹은 왕이나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부터 부유한 개인들이 많아지면서 그 폭이 넓어져 은행가·제조업자·상인·학자 등이 미술가들과 교류하고 후원하게 되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경우가 피렌체의 은행가였던 메디치 가문이었다. 미술 수집은 부와 영화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군주들도 강력한 후원자로 계속 남아 있었다. 만토바의 영주 이사벨라 데스테나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이 그 중 유명한 미술 컬렉터였다.
사생아로 태어나 16세부터 직업 용병
숱한 권력다툼..‘군주론에 영감’ 주장도
막대한 재산 앞세워 우르비노 부흥 견인
이들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결코 뒤지지 않은 인물이 바로 용맹한 군인이었던 우르비노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1422~1482)였다.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다. 우르비노의 영주 기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의 사생아로 태어난 페데리코는 16세에 직업 용병이 됐다. 많은 전쟁에 나가 싸워 이겼고, 그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군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거친 삶 속에서 28세 때 창 시합에 나갔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얼굴에 큰 흉터도 생겼다. 의사가 수술을 해서 콧등을 주저앉혔는데 이 수술로 시력을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대의 유명한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1415~1492)는 페데리코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스포르자 가문에서 온 바티스타의 이중 초상화를 그렸는데,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도록 옆 얼굴을 묘사해 다친 눈이 보이지 않게 했다. 그는 공작의 유일한 적자였던 오단코니오가 암살당하자 22세의 나이에 우르비노를 통치하게 됐다. 그 후에도 용병 장군으로 피렌체, 밀라노, 나폴리 등 여러 도시를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끎임 없는 음모와 술수, 권력 다툼을 경험하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쓸 때 페데리코의 생애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1474년, 로마에서 교황 식스투스 4세에게 공작의 작위를 받았고 그의 딸은 교황의 조카와 결혼하게 된다.
돈을 위해 싸웠던 페데리코는 많은 재산을 모아 우르비노를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때까지 문화적으로 고립됐던 이 도시를 인문학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화가 라파엘, 건축가 브라만테가 바로 우르비노 태생이다. 또 그는 책을 많이 읽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헌들을 모아 당시 바티칸 다음으로 가장 큰 도서관을 가지게 됐다. 학자들을 시켜 방대한 고대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게도 했다.
1470년대, 피에로에 대형 제단화 의뢰
장엄한 공간 속 성인·성모자·천사 그려
수학에 근거한 원근법 등 정확히 계산
1470년대, 아마도 1472년에서 1474년 사이 무렵에 그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 큰 제단화를 주문했다. 바로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가 경배하는 성인, 천사, 그리고 성모자’다. 이 작품은 현재 브레라에 있기 때문에 흔히 ‘브레라 제단화’라고도 불린다. 그림에는 반원형의 후진(apse) 공간을 배경으로 6명의 성인과 4명의 천사들이 성모자를 둘러싸고 있다. 성인들은 왼쪽으로부터 세례요한, 성 베르나르디노, 성 히에로니무스이며 오른쪽에는 성 프란체스코, 순교자 성 베드로, 복음사가 요한이 있다. 이들은 모두 견고한 입체감을 지니고 부동적이고 사색적인 엄숙한 분위기를 준다. 이러한 구성을 ‘사크라 콘베르사지오니(sacra conversazioni)’이라고 하는데 성모자와 성인들이 마치 무언의 ‘성스러운 대화’를 하는듯한 장면을 의미한다. 단 하나의 실제 인물인 주문자 페데리코는 이 성스러운 공간에서 조금 떨어진 앞쪽에 반짝이는 강철 갑옷을 입고 헬멧과 목이 긴 장갑을 벗어 앞에 놓은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지만 자세는 아주 꼿꼿하다. 단면도로 보면 인물들이 오메가 글자(Ω)와 같이 대칭으로 배열돼 있는데, 단 하나 대칭을 흩어놓는 것은 페데리코의 앞 자리가 비어있다는 점이다.
이 제단화에서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부분은 원근법에 충실한 장엄한 건축공간이다. 이 그림은 후일 옆 부분이 잘린 것이 발견돼 원래 그림에서는 건축 공간과 인물의 관계가 훨씬 여유로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15세기 피렌체에서는 수학이 명확한 신의 진리를 나타낸다고 믿었고, 수학에 근거한 원근법은 시각의 과학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대의 건축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은 이 건축물은 실제 재현할 수 있으리만큼 정확하게 계산됐다. 학자들은 건축과 인물의 비례를 계산해 측정한 결과 성모와 성인들이 서 있는 공간은 트란셉트(transept), 즉 제단과 청중의 공간이 교차되는 장소로 설정된 것을 알아냈다.
이 제단화의 절대적인 중심은 정중앙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의 머리이다. 머리 위에는 조개껍질에서 내려온 은빛 줄에 달린 알이 함께 수직축을 이룬다. 달걀은 흔히 부활을 상징하는데 이 경우 크기로 보아 타조의 알로 추측되고 있다. 타조 알은 어미 새가 품지 않더라도 햇빛에 의해 부화한다 해서 하느님의 아이를 낳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며, 아직도 일부 교회에서는 타조 알을 제단에 걸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제단화는 이제까지의 ‘성스러운 대화’ 장면과는 다른 점이 많다. 왜 타조 알일까. 종교화에 갑옷을 입고 등장하는 예는 없는데 왜 페데리코는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페데리코의 앞자리가 비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인물들은 수직으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데 왜 아기 예수만 비스듬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이후 많은 논의를 낳았지만 아직도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고 있다.
타조알·빈자리·갑옷·눈감은 아기예수..
기존 ‘성스러운 대화’와 달라 해석 분분
“페데리코 개인史 깃든 매혹적 그림” 평가
일련의 학자들은 이 작품을 페데리코의 개인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즉 그의 첫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섯 번째 아기이자 첫 아들을 가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부인 바티스타가 25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므로 페데리코 건너편에 비어있는 자리는 원래 바티스타를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타조 알이 등장한 것은 타조가 군인 페데리코의 문장에도 나타나고 부인 바티스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자고 있는 아기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미래를 예고하는데 성모와 성인들은 모두 아기가 부활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 부인의 영생을 비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아기의 목에 걸린 산호 목걸이와 구슬도 최근 주목을 받았다. 산호는 원래 악한 기운을 물리침을 의미하지만 산호의 가지는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쉬는 폐를 상징하며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다. 또 다른 해석은 이 작품이 마리아에게 바치는 봉헌도라는 것이다. 페데리코는 마돈나로 표상되는 교회의 축복을 기원하고, 반면 완전무장한 자신은 그림을 의뢰한 주문자일 뿐 아니라 용맹한 군인으로서 교회의 수호를 약속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모든 해석은 나름대로 흥미롭지만 정확한 의미를 모르더라고 그림 자체가 완벽하게 매혹적이다. 빛나는 갑옷과 정교한 무늬의 카펫, 페데리코의 손에 낀 반지, 교황이 내린 선물인 빨간 벨벳 장식의 칼, 보석이 장식된 천사의 의상 등의 세밀한 묘사는 물질에 대한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끌리게 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은빛 톤의 광선이 비쳐 주는 차갑고도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의 디테일, 조각적인 인체와 삼차원 공간의 통일감이다. 원근법에 근거한 건축과 인물들은 모두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묘사됐는데, 기하학적 형태는 인간의 불완전과 우유부단함을 극복하는 확고부동하고 완벽한 형태로 생각됐다. 피에로는 후기 작품에서 지나치게 수학에 몰두해 인간적인 감수성에 소홀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가 원했던 것은 일상의 사소함을 벗어난 초월적인 세계였을 수도 있다.
/미술사학자·前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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