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함께 대학도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1세대 대학이 교육을 통해 고급인재를 육성했다면 2세대에서는 교육과 연구를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과학 등 전 영역에서 역량을 강화하고 산업현장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공급했다. 3세대 대학은 연구개발(R&D) 역량을 극대화하는 한편 기술 사업화를 통해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최근 대학마다 산학협력단을 운영하면서 창업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나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기술창업을 북돋는 것 역시 이러한 흐름의 일환이다. 특히 미국이나 이스라엘·중국 등 글로벌 기술 트렌드를 선도하는 국가들의 경우 이미 길게는 수십년 전부터 대학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실험실에 머물렀던 연구성과를 사업화하는 등 성공 모델을 내놓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기술창업 활성화를 위한 대학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지난 10월 고려대 기술지주회사 사령탑으로 영입된 장재수 대표는 최근까지 30여년간 삼성전자(005930)에서 기술전략과 신규사업기획을 담당했던 핵심 브레인이다. 고려대 개교 이래 처음으로 ‘이공대 출신 총장’이라는 기록을 세운 정진택 총장이 야심 차게 영입한 인사다. 장 대표는 22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대 이공대캠퍼스 산학관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과거에는 기업들이 자체 R&D 역량을 통해 혁신을 꾀했지만 지금은 기술 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스타트업에 투자하거나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술혁신에 나서고 있다”면서 “오픈 이노베이션 시대에 R&D의 근원인 대학이 기술창업 생태계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삼성 출신으로 대학 기술지주회사를 맡게 된 이력이 특이한데.
△삼성전자 미래기술육성센터장을 맡으면서 교수들을 많이 접했다. 최근 국내 대학에도 글로벌 수준의 연구성과를 가진 분들이 크게 늘면서 대학의 잠재역량도 높아졌다. 이러한 대학의 R&D 역량을 대기업이나 벤처기업으로 연결해 시너지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러다가 정진택 총장이 귀한 자리를 제안해 고민했는데 평소 존경하는 선배가 ‘30년간 직장생활을 했으니 남은 삶은 의미 있는 일을 해도 좋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운 좋게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해외 네트워크를 많이 구축했으니 이를 기술창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특히 기술지주회사의 특성상 심사 협력이나 투자유치, 엑시트(EXIT) 등 다양한 과정이 동반되는데 외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합류하면 시너지 효과를 내지 않을까 기대했다.
-최근 대기업들도 미래 먹거리 발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신규사업 기획이나 기술전략 수립 등을 주로 하면서 미래 먹거리 발굴이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며 30년을 살았다. 특히 실리콘밸리 법인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미국 기업들이 치열하게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우리 대기업 못지않게 글로벌 기업에도 새로운 먹거리 창출은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다만 실리콘밸리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대학의 혁신역량이었다. 스탠퍼드대나 UC버클리에 가면 대학원생 중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이 많다. 아직 국내에서는 대기업 연구소 입사나 학위를 딴 후 교수가 되는 진로를 선호하는 데 반해 이들은 십중팔구 창업에 나선다. 자신이 대학 실험실에서 연구한 것을 창업을 통해 완성해가고 비즈니스 모델이 검증되면 구글 같은 대기업에 매각하는 벤처생태계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기술창업은 대학 밖에서도 가능한데 대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기술창업이 되려면 기술 역량을 갖춘 인재가 지식재산(IP), 즉 기술특허를 갖고 창업해야 한다. 이 정도 퀄리티의 경쟁력을 갖춘 인력은 대기업 소속 연구원이나 대학 교수, 석박사급 인력 등이다. 그런데 대기업 연구원들은 안정된 직장 덕에 굳이 창업이라는 모험을 택하려 하지 않고 교수도 직업의 안정성 때문에 창업 니즈가 크지 않다. 하지만 대학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역할을 변화시켜야 한다. 대학이 기술창업의 원천이 돼 창업의 씨를 뿌리고 기술지주회사가 인큐베이팅하면 전문 벤처캐피털이 자금을 투입하면서 성장 속도를 높이고 이런 기술들이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으로 이전돼 스케일업으로 연결되는, 혁신창업생태계의 선순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기술창업이 일반 창업보다 어려운 점이 있다면.
△기술창업의 핵심요소는 인재와 기술 그리고 특허다. 사업적 가치가 있는 특허가 되려면 권리범위를 넓히고 잠재적 경쟁자들이 (특허를) 회피하여 결국 모방할 수 없도록 보호장치를 확보해야 한다. 국내는 물론 미국·유럽연합(EU)·중국·일본에 출원해야 특허의 상품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적어도 1억원 넘는 비용이 투입된다. 교수들이 기술을 개발한 후 특허를 내려고 해도 첫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교수들에게 우선순위는 사업화가 아니라 논문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 특허를 출원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특허강국이라고 하지만 양적 성장에 치우쳐 질적 성장을 놓쳤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술창업을 활성화하려면 이렇듯 기본기부터 다져야 한다. 해당 기술의 배타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해외 특허를 제대로 출원해야 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지원도 훨씬 늘어야 한다.
-기술지주회사를 통한 기술창업 활성화를 위해서는 규제 완화도 언급되는데.
△기술지주회사는 자회사의 의결권 있는 주식의 20% 이상을 보유해야 하고 지분 양도나 합병·증자 등으로 지분보유 조건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5년 이내 20% 지분을 회복하거나 보유지분 전량을 매각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기술지주회사의 경우 ‘사업 내용의 지배’가 아닌 ‘자회사의 사업 지원’이 주목적인데 투자한 회사가 성장할수록 20% 이상 지분을 보유하는 것은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대학기술지주회사협회 차원에서 자회사 지분보유 비율 기준을 현행 20% 이상에서 10% 이상으로 완화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아직 개선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대기업 입장에서 살 만한 스타트업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국내 대기업들이 욕심을 가질 만한 기술창업 케이스가 적다. 아울러 국내에서는 경제논리 외의 다른 이슈가 인수과정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M&A를 위한 딜을 하는 과정에서 무산되는 일이 많은데 벤처기업 입장에서는 기술을 탈취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스타트업을 통째로 사기보다 IP와 핵심인력만 따로 떼어내는 방식의 부분인수가 보편화돼 있다. 이렇게 되면 고용 등 여러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해외에서는 수천억원을 들여 인수하는 사례가 종종 나오는데.
△물론 대기업도 한국에서 그런 회사가 나오면 훨씬 바람직하다. 기술 공유, 비즈니스 모델 고도화, 조직관리 등 전반적인 이슈를 놓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려면 말이 통하는 게 낫지 않겠나. 다만 벤처생태계는 가장 자본주의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치평가(밸류에이션)가 고객 중심으로 결정되는 시장이다. 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이해관계자가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생태계를 만들어가도록 둬야 한다.
-기술창업은 궁극적으로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할 수밖에 없는가.
△본질적으로 창업이란 새로운 기술이나 아이디어로 큰 것(big thing)을 만드는 것이다. 가치를 크게 인정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시장이 커야 한다. 해당 기술을 구매할 시장이 크든가 인수한 회사가 커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국내 시장만으로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에 한계를 가진다. 아이디어 창업의 경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보다 시장 안의 가치를 대체하거나 나누는 일이 다반사다. 실제로 최근 이런 이슈로 사회적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또 해외로 나가면 해당 국가의 문화나 규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빅마켓인 미국이나 중국에서 아이디어 창업은 기술창업보다 훨씬 어려울 수 있다.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독보적인 기술창업, 그것이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있다.
-고대 기술지주회사 대표로서 경영목표가 있다면.
△현재 200억원 정도의 펀드를 조성해 운용하고 있다. 보통 운용수익을 2~2.5% 정도로 보는데 이 기준이라면 재정자립을 하지 못한 상태다. 고대 기술지주회사의 경우 운영비만 10억원 안팎이 소요된다. 추가 재원을 마련해 400억원 내외의 펀드를 운용하고 이를 통해 자립기반을 확보하는 게 1차 목표다. 미국에서는 대학 기술지주회사가 수익을 내 학교의 교육투자재원 마련에 핵심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수익도 내고 학내 창업도 활성화하는 것이다. 정부가 오는 2022년까지 대학 기술지주회사에 6,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했으니 낙관적으로 본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He is…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미국 시라큐스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전자기기연구소에 입사했다. 1990년부터는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기술기획팀에서 일하다 1993년부터 4년간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 기획팀 기획담당으로 파견 근무했다. 삼성전자 미국 정보통신법인(STA) 주재원, 정보통신총괄 신규사업기획그룹장, 통신연구소 기술기획그룹장을 지내다 2009년부터 3년간 미국R&D법인장으로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했다. DMC연구소 기술전략팀장(전무급), 미래기술육성센터장,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사무국장 등을 맡다가 지난 10월부터 고대 기술지주회사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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