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을 하면 훗날 고급 시계를 차고 외제 승용차를 탈 수 있을까요. 밤새 일하고 먹고 입고 싶은 것 아끼며 더할 나위 없이 성실히 살면 미래 어느 날 그토록 원하던 한강뷰를 즐기는 아파트에서 배우자와 와인 한잔 마시며 지난 열심히 살아온 젊은 날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을까요.
젊은 층의 이 같은 환상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여러 가지를 포기),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 세 가지 포기), 5포 세대(3포+내 집 마련·인간관계),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 밀레니얼 세대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에 따라 밀레니얼 세대들은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삼아왔던 과거 대다수의 부모 세대의 삶의 방식을 택하지 않습니다. 물질에 대한 과시 보다는 고전, 철학, 인문학 등 내면을 탐구할 수 있는 경험에 대한 욕망이 점차 커지고 그런 경험이 부의 축적 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는 거지요. 특히 몇 년 새 등장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SNS(소셜네트워크)가 그들의 이런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를 부추기며 가치 소비에 밀레니얼 세대들을 동참시키고 있습니다.
◇신념이 벽장 속에서 나오다=밀레니얼 세대의 이 같은 소비 패턴을 트렌드 용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미닝아웃(Meaning out)’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자신이 가진 정치적·사회적·윤리적 신념을 소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밀레니얼 세대는 최근 ‘미세먼지’ ‘기후변화’ ‘케미컬천국(chemical paradise)’등 각종 환경오염을 인간의 생존이 걸린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면서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개인의 선호를 넘어 공동체의 의무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이거 재활용되나요”를 묻는 대학생이 생겨나고 있으며 종이컵을 쓰지 않기 위해 텀블러를 필수로 챙기는 회사원들, 의류가 환경오염의 주범 중 하나라고 여기는 소비자들 덕분에 중고의류매장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기업이 선언해 소비자들이 추종하는 것이 아닌 환경에 대한 신념을 가진 지구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절실한 소비자들이 앞장서 기업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겁니다. 업의 특성상 포장재가 많은 유통기업들은 불필요한 포장재 배출 감소와 재활용 되는 친환경 소재를 쓰는가 하면 탄소 배출 최소화, 유해성분 배출 감소 등 필(必)환경에 집중한 제품을 선보이며 소비자의 마음을 잡기 위해 애씁니다.
◇당신은 지속가능한 디자이너인가=2020 봄·여름 패션위크의 최대 이슈는 바로 지속가능으로 유명하다는 글로벌 패션 디자이너들은 지속가능 패션의 ‘혁명가’로 등장한 것이죠. 4대 패션위크의 시작을 알린 뉴욕에서는 디자이너 콜리나 스트라다가 “지구에 더 친절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최근 대표적인 에코프랜들리 디자이너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제로+마리아 코르네조는 지속 가능한 소재의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가브리엘라 허스트는 최초의 탄소 중립 패션쇼를 열겠다고 선언을 했지요. 크리스토퍼 케인의 내년 봄·여름 콜렉션의 테마는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에코섹슈얼’이었습니다. 요즘 밀레니얼들 사이에 환경을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섹시하다”는 것과 맞닿아 있지요.
밀라노패션위크에서는 2018년 봄부터 모피 사용을 중단한 구찌가 탄소 중립 패션쇼를 열겠다고 선언했고요, 발리는 프리젠테이션 세트의 목재를 재활용하고 녹초는 다시 땅에 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명품 브랜드들은 아직 친환경 소재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지 무대 세트에 사용된 목재를 활용하겠다는 것으로 환경 보호 동참에 숟가락을 얹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4대 패션위크의 종착지인 파리에서 디올은 패션쇼 배경으로 사용한 나무를 쇼가 끝난 후 도시 전역에 심기로 했고, 미우미우와 루이비통은 웨이 무대 세트에 사용된 목재를 기증했군요. 대표적인 지속가능 브랜드 스텔라 맥카트니는 75%의 친환경 소재를 사용한 ‘가장 지속 가능한 콜렉션’을 과시했지요. 마린 세레는 기후 전쟁, 한여름의 혹서, 대량 멸종으로 야기된 종말론을 테마로 다양한 업사이클 소재를 이용한 옷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모았습니다.
◇“나는 에코섹시 브랜드”=우루과이의 시골뜨기 모델에서 뉴욕서 가장 바쁜 디자이너이자 미디어 재벌 허스트가의 며느리가 된 패션계 신데렐라 가브리엘라 허스트의 제품은 이 시대 진정한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는 연예인 고소영씨가 든 ‘아코디언 백’이 유명한데요. 우루과이 양 목장의 소유주인 그녀는 극심한 자원 소모를 피하기 위해 핸드백을 대량 생산하지도 않고 재활용 소재 패키지를 사용해 지속 가능성에 반하는 낭비에 엄격합니다. 옷의 면을 천연 알로에 리넨 소재로 대체하고 데님처럼 보이는 원단도 리넨과 울 혼방 소재를 사용합니다. 나무를 자르고 그 생산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는 비스코스 또한 실크와 울 혼방 소재로 대체했습니다. 얼마 전 방한해 만난 허스트는 “분해 가능한 소재를 사용하고 의류를 출고할 때나 매장에 옷을 걸 때도 플라스틱 옷걸이, 비닐을 사용하지 않는다”며 “지구가 겪고 있는 문제에 나까지 보태면 내 사업의 당위성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칠레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친환경 패션 디자이너 마리아 코르네호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에코섹시 브랜드 브랜드입니다. 전 미국 영부인 미셸 오바마와 배우 틸다 스윈튼 등이 그녀의 옷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폐기되는 캐시미어 실을 활용한 친환경 니트와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를 사용한 가죽 의류가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답니다. 지난 여름에는 현대자동차와 손잡고 자동차 시트 짜투리 조각을 이용해 스타일리시한 업사이클링 캡슐 콜렉션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이름을 날리지는 않았지만 제품 기획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을 환경을 고려해 정말 잘 되었으면 하는 사회적기업 브랜드가 있습니다. ‘제로디자인(Zero Design)’.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봉제공장에서 버려지는 천을 미술재료로 사용했답니다. 쓰레기봉투를 표현하기 위해 반투명한 비닐 재질의 폴리우레탄 원단을 사용한 제로 쿠션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선행과 아트를 함께 소유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착한 기업 띄우기에 동참한 ‘네타포르테’=글로벌 온라인 플랫폼 네타포르테가 다른 글로벌 온라인 쇼핑몰과 다른 점은 트렌드를 잘 읽을 뿐 아니라 좀 더 나아가 혁신성을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 브랜드 ‘르917’를 포함시킨 글로벌 신진 디자이너 육성 ‘더 뱅가드’를 발표하거나 26개의 착한 브랜드를 선정한 ‘넷 서스테인(NET SUSTAIN)’ 론칭 같은 것이 대표적이에요. 특히 후자의 경우 다섯 가지의 자연과 인간을 고려한 지속 가능한 속성 중 한 가지 이상을 충족시키는 브랜드를 선정하고 판매 중이랍니다. 예컨대 사람과 동물, 환경 모두를 고려했거나 친환경 공정이거나 폐기물을 최소화하는 등 지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브랜드를 환영했습니다. 여기에는 스텔라 맥카트니, 마더 오브 펄x BBC, 100% 에코프랜들리 제품을 생산하는 브랜드 매기 마를린의 독점 캡슐과 나인티 퍼센트, 피쉬, 렘렘, 피오니, 베자, 헤레우, 나난카이, 쇼파드 등 시즌 별 핵심 스타일 제품이 뽑혔군요.
이 가운데 요즘 국내 패피들 사이에 인싸템으로 떠오른 브랜드는 천연 소재만 고집하는 프랑스의 친환경 스니커즈 브랜드 ‘베자(VEJA)’입니다. 젊은 창업자 세바스티앙과 프랑수아가 지속가능한 경영에 대해 고민하던 중 2004년 처음 세상에 나오게 됐는데요. 브라질 목화로 만든 오가닉 코튼과 아마존에서 채취한 천연 고무와 천연 라텍스 소재의 인솔 등은 편안한 착화감과 더불어 베자라는 브랜드를 프리미엄 브랜드로 만들어 놓았지요. 여기에 생산조합 농민들에게는 시장가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 공정무역을 통해 친환경 경영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지요. 베자의 윤리성이 브랜드를 쿨하고 더 섹시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생활산업부장 yvette@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