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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인들]김원봉에 폭탄기술자 소개...항일투쟁 앞장 선 '몽골의 슈바이처'

■의사 겸 의열단원 이태준

의대생 때부터 구국운동에 참여

안창호 권유로 청년학우회 가입

신해혁명 자극받고 中망명 결심

난징서 김규식 만나 새활로 모색

몽골로 이주...황제 어의로도 활약

지인소개로 베이징서 김원봉 만나

헝가리 폭탄기술자 마쟈르 추천

의열단 무장투쟁활동에 큰 기여

러시아 군대 습격에도 피난 거부

결국 1921년 2월에 처형당해

이태준 선생./사진제공=동은의학박물관




오는 10일은 1919년 중국 만주에서 대표적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이 결성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영화 ‘밀정’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의열단의 폭탄 투척 의거를 보면서 ‘과연 그 폭탄을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와 일제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폭탄은 한국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헝가리인 마쟈르가 만들었다. 이 마쟈르를 김원봉에게 소개한 사람은 몽골에서 의사로 널리 알려진 대암(大岩) 이태준(李泰俊·1883~1921) 선생이다.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醫師) 선생이 어떻게 국가와 민족의 상처를 치료하고 국권과 주권을 회복시키는 의사(義士)가 됐을까.

이태준(뒷줄 왼쪽 네번째) 선생이 세브란스의학교 제2회 졸업식에서 동료들과 찍은 사진./사진제공=동은의학박물관


◇의사를 꿈꾸는 청년 이태준, 안창호와 만나다=이태준은 1907년 10월 지금의 연세대 의과대학인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해 약 3년9개월 만인 1911년 6월에 졸업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이태준의 학적부를 보면 4학년 때 수강한 과목으로 내과 74점, 외과 61점, 이비인후과 85점, 산부인과 60점으로 4과목 평균점수가 70점이었다. 이태준과 함께 졸업한 세브란스 제2회 졸업생은 강문집(姜文集) 등 6명이었다. 세브란스의학교에 재학 중인 이태준은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그러나 이태준은 세브란스의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편안한 의사의 삶보다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 이후 일제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안창호 선생이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가 1910년 2월 석방된 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이때 세브란스 의대생 이태준은 자연스럽게 안창호와 가까이 지내게 됐다. 안창호가 열심히 권하고, 당시 회비 1원을 납부하고 최남선에게 추천함으로써 이태준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다.

이태준은 미국으로 떠난 안창호에게 1912년 7월16일 보낸 편지에서 1911년 중국에서 발발한 신해혁명에 큰 자극을 받고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됐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태준의 중국행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같은 세브란스 제1회 졸업생인 김필순(金弼淳·1878~1919)이었다. 김필순을 따라 중국 난징에 도착한 이태준은 중국 혁명세력에 가담했던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류하면서 활동을 모색했다. 그러나 낯선 땅 중국에서 이태준은 여비가 끊어지고 언어장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겨우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 의사로 취직해 생계를 꾸려나갔다.

◇김규식과의 만남=이태준은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을 만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되살리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나갔다. 몽골에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하려는 김규식의 권고로 1914년 이태준은 중국 난징에서 머나먼 여정을 거쳐 몽골로 건너갔다. 몽골의 고륜(庫倫), 즉 현재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이주한 이태준은 의사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병원을 개원했다. 병원 이름도 ‘항일독립운동의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고 지었다. 이 동의의국은 당시 중국과 러시아·몽골 등 해외로 옮겨 다니는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몽골에 와서 머물러간 곳이자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이었다.

이태준은 자신의 병원을 찾아온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 등 편의를 제공했다. 이강훈 전 광복회 회장도 몽골에 건너갔을 때 이 동의의국에서 몇 달간 지냈으며 어떤 날은 40~50명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머물면서 숙식할 정도였다.

몽골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에 있는 훈장비


이태준이 처음 왔을 때 몽골인들은 병이 생겨도 근대적 의술을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으며 라마교의 영향으로 미신적 주술치료를 받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이태준은 낯선 몽골인들을 외면하지 않고 치료에 전념했다. 그의 뛰어난 의술로 성병 등으로 고통을 받았던 몽골인들이 치료받으면서 낯선 외국인 이태준은 몽골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큰 신망을 받게 됐다. 의사로서 그의 실력과 성품을 인정받아 이태준은 당시 몽골의 마지막 황제인 보그드 칸의 어의가 됐다. 몽골인들은 이태준을 신(神) 또는 부처와 같이 생각했으며 몽골 정부는 이태준에게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높은 등급의 훈장을 수여해 근대 의술로 몽골인들의 질병을 치료한 공헌을 치하했다.

이태준 선생 묘




몽골 정부 문서를 보면 고려국 국적민 의사 리 다인에게 ‘우리의 보그드 칸(몽골 황제의 이름) 당신으로부터 칭송하고 격려’하기 위해 훈장을 수여한다고 적혀 있다. 이때 리 다인은 이태준의 호 이대암(李大岩)의 몽골어 표기로 그가 받은 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훈장이었다.

◇몽골 황제의 어의 이태준, 김원봉과 만나다=이태준은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태준은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에게 2,000원의 독립자금을 제공했다. 몽골에 자리 잡은 이태준은 러시아와 한국·중국을 오가는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해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동수단과 숙소를 제공했다. 1921년 이태준은 한인사회당 비밀당원으로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하는 자금을 운반하기도 했다. 당시 소비에트 정부가 건네준 자금 40만루블의 금괴 중 8만루블을 김립과 함께 상하이로 운송했다.

상하이에서 몽골로 돌아오던 길에 이태준은 베이징에서 지인의 소개로 의열단을 결성한 김원봉과 만나게 됐다. 무장독립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이태준은 김원봉을 만난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다. 김원봉으로부터 의열단 활동의 주된 무기인 폭탄이 제대로 제조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에 이태준은 자신이 알고 있는 자동차 운전수인 헝가리인 마쟈르가 뛰어난 폭탄 제조기술자라고 소개했다. 다시 몽골에 돌아온 이태준은 마쟈르에게 상하이에 있는 김원봉을 찾아가 폭탄 제조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마쟈르는 베이징으로 김원봉을 찾아간 후 의열단이 필요로 한 각종 폭탄을 제조함으로써 의열단의 무장투쟁활동이 큰 성과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이태준 선생 기념관 전경


◇피난 가기를 거부한 이태준의 최후=그러나 다시 몽골 고륜으로 돌아온 이태준은 러시아 백위파 군대에 체포됐다. 1921년 2월 고륜을 점령한 후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던 러시아의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에 참모로 있던 일본 장교들이 이태준을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 군대의 습격 이전에 이태준은 고륜에 주둔한 중국 군대 사령관의 주치의로 활약했다. 중국군의 가오시린 사령관이 철수할 때 이태준에게 같이 몽골을 떠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몽골에서 할 일이 많이 남은 이태준은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았으나 결국 러시아 군대에 의해 1921년 2월에 처형당했다.

이태준의 묘지는 몽골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부르는 울란바토르 시내 남산 건너편 구릉에 위치했다. 나중에 여운형 등 독립운동가들이 그의 묘지를 찾아가 참배할 정도로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장소가 됐다. 그러나 그의 묘지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조차 없이 사라졌다. 현재는 울란바토르시의 유명한 관광지인 자이산 승전탑(전망대) 근처에 그의 희생과 정신을 기리는 기념공원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 초기에 근대 의술을 배운, 한국에서 몇 명 안 되는 의사 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태준의 삶은 부와 출세와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고향을 떠나 먼나먼 몽골에서 병원을 짓고 자신이 배운 의술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많은 사람을 살렸다. 적은 병원 수입마저도 몽골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는 등 뒷바라지하면서 독립을 향한 꿈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몽골에 남아 지키고자 했던 이태준의 열정은 일본군의 요구를 그대로 따른 러시아 점령군에 의해 최후를 맞음으로써 꺾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가 꿈꿔왔던 조국 독립의 의지와 의사로서의 숭고한 정신은 죽은 지 약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몽골의 드높은 파란 하늘과 넓은 초원의 바람 소리처럼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김현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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