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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업안전 규제도 품질 고려해야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안전공학

지난 1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모호한 표현 많고 처벌에만 치중

누구를 위한 개정인지 탄식 나와

정교하고 실효성 있는 법규 절실

정진우 서울과기대 교수




지난해 정부의 산재 사망사고 절반 줄이기 대책에도 불구하고 산재 사고로 사망한 근로자는 오히려 증가했다. 산재 예방을 위한 행정적 자원과 인원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초라한 성적을 거둔 것이다. 기업으로 치면 유례없이 큰 적자가 발생한 셈이다.

게다가 이 실적은 중대재해 발생 공장 전체에 대한 초법적인 작업중지 명령 등으로 어느 때보다 기업에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나온 것이어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산재 예방정책의 접근방식에 대한 많은 반성과 대대적인 수술이 필요하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1월에 전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과 최근 입법예고를 거쳐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의를 앞두고 있는 하위법령 개정안은 사망사고 감소를 위한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고 법의 취지와 실효성에 대한 고려 없이 행정편의주의와 제재 일변도의 접근을 되풀이하겠다는 것이어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작업중지 명령 부분이다. 과도하게 광범한 작업중지 명령 규정 자체가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불명확하고 모호한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 행정기관의 자의적 집행이 불을 보듯 훤하다. 작업중지 명령 요건의 대부분에는 법령이 아니라 행정기관이 제멋대로 정하겠다는 행정독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법규가 애매하거나 그 적용범위가 지나치게 불명확한 것은 법치주의의 핵심이자 민주주의 원리인 명확성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된다. 그리고 작업중지 명령 해제를 작업중지의 취지인 급박한 위험의 제거와 무관하게 안전조치의 ‘충분한’ 개선을 전제로 하겠다는 것은 기업이 졸속으로 안전조치를 수립하도록 조장한다. 이는 재해 예방에 도움은커녕 기업의 안전관리를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급박한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다른 ‘소프트’한 방법이 있는데도 재해원인을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작업중지를 하겠다는 것도 초법적 발상이다. 예방이 목적인 작업중지를 제재 목적으로 오용하려는 데서 기인한다.



이번 개정안에는 법을 준수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지,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지를 의심케 하는 규정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도급 관련 규정이다. ‘위험의 외주화’라는 프레임에 갇혀 원청업체에 ‘묻지마 규제’를 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을 뿐 명분으로 내걸고 있는 하청근로자 보호효과를 실제로 거두기에는 매우 엉성한 접근을 하고 있다. 전문가조차 도급작업에서 누가 어떤 안전조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예측·판단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규제가 현장에서 작동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 준법 의지가 강한 기업조차도 제대로 준수할 수 없다는 것은 명확성 원칙 위반 이전에 법의 규범력에 큰 손상을 입힐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 개정인가”라는 장탄식이 현장에서 나오는 이유이다.

정부가 진정 사망사고 절반 줄이기에 의지가 있다면 보여주기 식의 조잡한 규제를 양산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기업이 법을 잘 준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분별력을 갖춘 자조차도 지킬 수 없으며 품질을 도외시한 불합리한 규제로는 범법자만 양산하고 많은 사회적 비용만 초래할 뿐이다.

독일의 형법학자 프란츠 폰 리스트가 “최고의 형사정책은 사회정책이다”라고 설파했듯이 산재 예방에서도 중요한 것은 기업에 책임을 떠넘기는 ‘책임의 외주화’와 처벌에 안이하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준법 실천력을 높일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정책이다. 그것의 첫걸음은 정교하고 실효적인 법규를 만드는 것이다.

일찍이 산재 예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재 예방은 과학이자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88년 전의 이 말이 이제라도 우리나라 산재 예방정책에는 통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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