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이 고조되는 호르무즈해협에서 영국 유조선이 이란에 억류되면서 중동 리스크가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지난 19일(현지시간) 걸프해역 입구 호르무즈해협에서 영국 유조선 ‘스테나임페로’호를 나포했다고 발표했다. AP통신은 이란이 호르무즈해협에서 영국 유조선 2척을 나포했다가 1척은 풀어주고 현재 스테나임페로호만 억류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혁명수비대는 “영국 유조선이 국제해양법을 위반했다는 신고가 혁명수비대 해군에 접수돼 선박을 이란 해안으로 유도해 정박시켰다”고 설명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정부 긴급회의에 앞서 “이번 억류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영국은 이번 사태가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서 이란에 대한 제재를 경고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이란 자산동결 등 경제제재를 21일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도 전날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 무인기를 격추했다고 밝힌 데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에 500여명의 군병력을 배치하기로 하는 등 이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 국무부는 19일 워싱턴DC 청사에서 한국을 포함한 60여개국 외교단 약 100명을 초청해 호르무즈해협 안보유지 협력을 간접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중동 정세가 연일 악화하는 가운데 이날 뉴욕에서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날보다 0.6% 오른 55.63달러, 런던 시장의 브렌트유 가격은 0.87% 상승한 배럴당 63.19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유럽으로 번진 美-이란 갈등...핵합의 휴짓조각 되나
[전운 더 짙어지는 호르무즈]
英, 자국 유조선 억류 이란에
자산동결 조치 부활 카드 꺼내
‘외교해법 주장’ 佛·獨도 항의
영국항공·獨 루프트한자는
카이로행 항공편 운항 중단
이란의 영국 유조선 나포를 계기로 지금까지 이란 대 미국의 대립으로 전개돼온 중동 갈등이 이란과 서방 간 대결로 본격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탈퇴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연합(EU)의 핵합의 존속 작전이 전개됐지만, 영국이 대이란 제재 복원까지 검토하면서 핵합의가 결국 공중분해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0일(현지시간)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이 이란의 자국 유조선 나포에 대응하기 위해 21일 대이란 경제·외교제재를 발표한다며 이 자리에서 EU 및 유엔에 제재 동참을 촉구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핵합의에 따라 지난 2016년 해제했던 이란 자산동결 조치 부활을 유럽 동맹국들에 요청하겠다는 것이다.
영국이 파장을 각오하고 제재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자국 유조선 ‘스테나임페로’가 전날 호르무즈해협에서 억류된 가운데 이란이 영국 측의 석방 요구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전날부터 이틀 연속 내각 긴급 안보관계장관회의인 ‘코브라’를 열어 이번 사태의 대응책을 논의했다. 헌트 외무장관은 이날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과 통화하며 “일주일 전 통화 때 긴장 완화를 원한다고 해놓고 정반대로 행동한 데 대해 극히 실망했다”는 뜻을 전달했다. 영국 외무부도 이날 런던 주재 이란 대리대사를 초치해 강력히 항의했다. 헌트 장관은 전날 스카이뉴스 인터뷰에서 “이 상황이 신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심각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영국은 이란의 자국 유조선 나포를 이달 초 이란 유조선 ‘그레이스 1호’ 억류에 대한 보복조치로 보고 있다. 영국령 지브롤터 당국은 4일 시리아로 향하던 그레이스 1호를 EU 제재 위반 혐의로 나포했다. 당시 이란 정부는 이란 주재 영국대사를 수차례 불러 항의했고 16일에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까지 나서 유조선 억류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주문했다. 이에 대해 이란은 “영국 유조선이 정해진 해로를 벗어났다”면서 ‘스테나임페로’ 나포가 합법적 조치임을 주장하고 있다. 반면 영국 국방부는 “억류 유조선이 이란 혁명수비대에 나포될 당시 이란 영해가 아닌 오만해역에 있었다”고 반박했다.
이번 사태로 영국이 유럽 주요국 가운데 처음으로 대이란 제재에 나설 경우 미국의 제재 동참을 거부해온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란과의 대결구도에 가세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지난해 핵합의 탈퇴 이후 유럽에 제재 동참을 압박했지만 핵합의 서명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은 중동 리스크 고조를 경계하며 이의 유지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란이 영국 유조선 억류를 강행하자 외교적 해법 모색을 주장했던 프랑스와 독일도 이란에 강력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이란은 즉각 억류 선원을 석방하고 걸프에서 ‘항해의 자유’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독일 외무부도 “또 다른 지역 긴장유발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며 이란을 규탄했다. 여기에 이날 영국항공과 독일 루프트한자가 이집트 카이로행 항공편 운항을 돌연 중단하자 유럽 주요국들이 호르무즈 사태를 의식한 대응조치에 나섰다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특히 총리실 주인이 뒤바뀌는 민감한 시기에 영국이 대이란 제재에 나서기로 하자 일각에서는 영국의 핵합의 탈퇴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며 핵합의가 결국 휴짓조각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오는 24일 총리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보리스 존슨 전 외무장관은 앞서 이란과의 군사적 충돌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집권 이후 첫 시험대가 될 이란 문제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핵합의 탈퇴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다른 서명국의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국이 핵합의 유지 노력을 멈추고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경제 질식에 동참할 수 있다”면서 “영국이 워싱턴의 대이란 정책을 따른다면 결국 EU의 핵합의 존속 노력은 전멸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창영기자 kcy@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