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국정과제인 자율형사립고(자사고) 폐지정책이 현실화하면서 고교와 대학 입시에 미칠 파장이 주목받고 있다. 올해 재지정평가 대상이었던 24개 자사고 중 절반에 가까운 11개 학교가 지정취소 결정을 받으면서 정부의 고교체제 개편 로드맵 3단계인 ‘사회적 합의를 통한 고교체제 개편(2020년 이후)’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정부의 목표대로 자사고 폐지가 고교 서열화 해소로 이어지며 공교육 정상화에 기여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큰 상태다.
11일 교육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에서만 평가 대상의 60%가 넘는 8개 자사고가 무더기 탈락 위기에 처하면서 해당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은 허탈과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다. 교육청의 지정취소 결정에 교육부가 동의할 경우 제도 도입 이래 처음으로 자사고의 일반고등학교 강제전환이 현실화된다. 그동안 취소 유예나 자진 반납, 청문 과정에서의 반납 등의 사례는 있었지만 교육당국에 의해 일반고로 강제전환된 사례는 없었다. 규모 역시 상상 이상이라 이대로라면 내년 평가 대상인 자사고들도 무더기 탈락 가능성이 예고돼 자사고 학생과 학부모 등은 물론 입학을 준비하던 학생과 학부모 역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한 자사고 학부모는 “(폐지가 현실화할 경우) 정성평가 비중이 상당한 수시전형이 입시의 70~8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정부 낙인이 찍힌 고교 출신을 대학들이 반기겠느냐”면서 “전학이 옳은 건지 그래도 학교를 믿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이 자사고를 선호하는 것은 그나마 ‘대입 준비가 가능한 학교’라는 믿음 때문이다. 선행 사교육이 절대적이라 여겨지는 외국어고·과학고 등에 비해 문턱이 크게 높지 않으면서도 학생 각자의 적성과 특징에 맞는 교육이 가능하다는 게 학부모들이 앞세우는 이유다. 일반고 다수가 소수의 내신 우수자를 제외하면 입시 준비 측면에서 별다른 대비책을 내놓기 힘든 반면 자사고, 외고, 과학고, 명문 일반고 등은 한 학생도 놓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작용하고 있다는 게 학부모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실제 입시 전문가들은 국내 인문계 고교의 30~40%가 사실상 대학수학능력시험 대비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진단한다. 시험 없이 대학에 가는 수시전형이 전체 모집인원의 77.3%(2020학년도 기준)에 달하고 중하위권 대학은 내신 위주의 수시 교과전형, 상위권 대학은 면접 등이 포함된 수시 학생부종합전형이 중심전형으로 떠오르면서 내신 관리와 교과목 정성평가 관리에 최우선을 두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학교들의 시험 난도는 갈수록 낮아졌다. 학급 내 실력 차가 상당한 일반고 입장에서 볼 때 학습독려를 어렵게 하는 요인을 입시제도가 품고 있는 셈이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특정 교과목의 학교 내신 평균이 70점 수준인데 수능 평균은 이보다 20~30점씩 낮은 학교가 서울을 포함해 전국 고교의 30~40%에 달한다”며 “이는 학교 시험이 지나치게 쉽다는 뜻으로 이들 학교에서 정상적인 수능 준비가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재수생의 정시입학 비중이 갈수록 늘어나는 원인 중 하나도 고교에서 수능 대비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수능 결시 비율은 지난해 말 10.9%를 기록하며 또다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는 등 두자릿수까지 치솟은 상태다.
게다가 학령인구가 줄고 학교 수에는 큰 변화가 없어 내신등급 획득에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서울에서도 신입생 인원이 100명이 안 되는 ‘미니 고교’가 등장했다. ‘인 서울’ 대학 입학을 위해 2~3등급 이내에 들어야 하고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려면 전 과목 평균으로 환산해 사실상 1%대의 내신성적이 요구되는데 입학인원이 줄어든다면 1등급(4%), 2등급(11%), 3등급 (23%)에 해당하는 학생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명문대 입학생’ 배출을 원하는 일반고에서는 소수인원의 내신 관리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한두 번 망쳤다면 일찌감치 ‘열외’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특히 고교 서열화 해소를 목표로 내세우면서도 자사고 최고의 입시 명문고라 할 하나고는 감사항목에서 최대 감점을 받고도 우수한 학교운영·교과과정운영 등을 이유로 재지정해 정부 정책이 구호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학년당 200명 남짓인 하나고는 2018학년도에 총 55명의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하는 등 학생 4명 중 1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하나고 학생이라면 3~4등급을 얻어도 서울대에 진학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이는 평가 대상 중 2~3위에 해당하는 강원 민사고(33명), 전북 상산고(30명)와 비교해도 현격한 차이가 나는 수치다. 반면 2018학년도 서울대 입시에서 전국 일반고의 55.5%는 단 1명의 서울대 입학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이들 고교의 1등급보다 하나고 3~4등급이 더 우수하다는 게 대학 측 답변인 셈이다.
상위권 대학들이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는 학생부종합전형에 목을 매는 이유도 이러한 고교별 ‘학력 차’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대학들은 평가 대상인 5개 학기의 반영비율 등과 같은 구체적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 입시 전문가는 “학교별 학력 격차가 이미 고착화한 가운데 자사고가 사라진다면 전체 일반고가 살아나기보다 또 다른 형태의 명문고가 암암리에 등장하며 정보 불평등성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렇다 보니 대입제도 개선이 없는 고교체제 혁신은 학교현장에 혼란만 부를 뿐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 3단계 로드맵 등을 보면 현 정부는 대입체제 개선을 사실상 다음 정권으로 이양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계 인사는 “내년부터 고3 학생 수가 30만명대로 추락하는 상황에서 입시제도를 수시와 정시로 나누고 학과 단위로까지 전형을 달리해 학교 및 교사를 입시에서 소외시키는 대입정책이 과연 타당한가”라며 “현 정부의 고교체제 개선책은 10년 전쯤이라면 모를까 현 상황에서는 중요하지도, 시급하지도 않은 부차적 문제”라고 말했다. /김희원기자 heew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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