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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메두사호의 침몰, 1816년

무능·부패 정부가 만든 人災

테오도르 제리코 1819년작 ‘메두사호의 뗏목’, 루브르박물관 소장.




1816년 7월2일, 아프리카 서안 브롱곶(지금의 모리셔스 중부 해안) 50㎞ 해상. 프랑스 군함 메두사호가 암초에 걸렸다. 보름 전 프랑스 중서부 로슈포르 항구를 떠난 메두사호의 목적은 세네갈 식민지 개척. 나폴레옹의 명으로 45척을 건조했던 40문 프리깃 중 한 척으로 1810년 건조된 메두사호의 출항은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패전으로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황에서 식민지 개척을 ‘과거의 영광 재현을 위한 도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왕정복고로 즉위한 루이 18세는 메두사호뿐 아니라 보급선 등 3척을 딸려 보냈다.

화려한 출항과 달리 메두사 선단은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장의 자질이 떨어졌다. 45세 쇼마레 선장은 승선 경험이 부족했음에도 왕당파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감투를 썼다. 자리를 얻으려 돈을 쓴 쇼마레 선장은 뒷돈을 받고 사람을 더 태웠다. 정원 326명인 메두사호에 400명이 넘게 탔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도착하려는 욕심에 쇼마레 선장은 선원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연안에서 속도를 올렸다. 결국 사구와 암초를 만나 난파했지만 구명정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쇼마레 선장은 귀족과 장교 등 ‘고귀한 신분’을 구명정 6척에 먼저 태웠다. 나머지는 메두사호에서 나온 판자로 길이 20m, 폭 7m짜리 대형 뗏목을 급조해 실었다. 쇼마레 선장은 뗏목을 연결한 구명정의 속도가 나지 않자 로프를 끊어버렸다. 망망대해에 버려진 159명이 탄 뗏목에서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격랑에 몸을 맡겨야 할 양쪽 가장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보다 안전한 중앙을 차지하려 싸웠다. 넷째 날 67명만 남은 상황에서 일부가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육을 먹고 피를 마셨다.

함께 출항했던 쌍범선 아르고호가 사고 보름 뒤 뗏목을 발견했을 때 생존자는 15명만 남았다. 발견 즉시 5명이 더 죽어 결국 10명만 살았다. 프랑스 왕정은 사건 자체를 숨겼으나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사건을 숨길 수는 없는 법. 사고 두 달 보름 뒤부터 왕정 반대 논조의 글이 신문에 실리며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왕정의 습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뗏목에 남기를 자원했던 군의관과 항해사가 이듬해 책을 내서 사건을 고발하고 28세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1819년 대작 ‘메두사호의 뗏목’을 그렸다. 무능하고 부패한데다 국민의 생명을 하찮게 여긴 부르봉 왕가는 1830년 끝내 무너졌다. 분노를 넘는 날카로운 기억과 기록의 힘, 그 파장이 역사를 만든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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