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골프계에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해외 동포 3인방이 있었다. 재미 동포인 케빈 나와 앤서니 김, 호주동포 이원준이었다. 미국 스포츠전문매체 ESPN은 지난 2007년 ‘25세 이하 골퍼 중 세계 톱25’에 이들 3명의 이름을 넣었다.
케빈 나는 지난 5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통산 3승째를 올리는 등 기대대로 정상급 선수로 잘 컸다. 앤서니 김은 2010년 부상으로 사실상 은퇴한 상태지만 2008년부터 2010년 사이에만 PGA 투어 3승을 거두며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미국)를 위협할 후보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원준은 10여년 전 골프팬들을 설레게 한 최고 유망주 중 가장 빛을 못 본 불운의 골퍼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호주로 이민 간 이원준은 열다섯에 뒤늦게 골프에 입문했는데도 190㎝, 93㎏의 체격으로 465야드의 어마어마한 장타를 뽐냈다. 아마추어 세계랭킹 1위를 지냈고 아마추어 때 이미 프로 대회 준우승을 경험했다. 2007년 LG전자와 10년간 연간 2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에 후원 계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로 무대에서 ‘장타 청년’ 이원준을 기다린 것은 큰 부상이었다. 이 때문에 최고 유망주다운 기량을 뽐내는 대신 골프팬들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갔다.
그랬던 이원준이 고국에서 프로 대회 첫 우승의 감격을 껴안았다. 2006년 프로 데뷔 이후 13년 만이다. 금세 터질 것 같았던 첫 우승이 서른넷의 나이인 결혼 2년차에 찾아온 것이다. 오는 10월 태어날 첫 아이에게 우승 트로피를 선물할 수 있게 됐다.
이원준은 30일 경남 양산의 에이원CC(파70)에서 끝난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제62회 KPGA 선수권대회에서 4라운드 합계 15언더파를 적은 뒤 연장 끝에 우승했다. 상금은 2억원이다. KPGA 투어 5년 출전권과 10월 제주에서 열릴 PGA 투어 CJ컵 출전권도 얻었다. PGA 투어 선수들과 화끈한 장타 경쟁에 나서게 됐다. 이원준은 남녀 통틀어 국내 최고 전통의 프로골프대회에 초청선수로 출전해 첫날부터 선두를 뺏기지 않은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작성했다. 앞서 2라운드까지 14언더파 126타를 쳐 KPGA 투어 36홀 최소타 기록도 남겼다.
이원준은 마지막 날 상위권 선수들이 모두 타수를 줄인 가운데 버디 3개와 보기 2개, 더블보기 1개로 1타를 잃었다. 같은 조인 제네시스(대상) 포인트 1위 서형석에게 계속 쫓기다 17번홀에서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결국 연장에 끌려갔지만 18번홀(파4)에서 서형석이 3m 버디 퍼트를 놓친 뒤 비슷한 거리의 내리막 버디 퍼트를 이원준은 집어넣었다. 앞서 정규 18번홀에서 물에 반쯤 빠진 상태에서의 두 번째 샷을 잘 꺼내 파를 지킨 것도 결정적이었다. 경기 후 어머니, 아내와 포옹한 이원준은 “편하게 경기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게 잘 안 됐다. 하지만 연장 버디 퍼트는 자신 있게 쳤다”며 “10년 넘게 기다려준 가족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이원준은 그동안 일본 투어와 PGA 2부 투어, KPGA 투어 대회에 출전해왔지만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프로 데뷔 5년 만에 손목 인대가 닳아 없어져 재기가 어렵다는 진단을 받은 적도 있었고 2년 넘은 공백 뒤 복귀 후에는 2017년에 허리 디스크 파열을 겪기도 했다. 그래도 골프채를 놓지 않은 이원준은 올해 일본 투어 상금 19위에 오르며 희망을 확인했고 한국에서 우승까지 다다랐다. 이날 이원준의 드라이버 샷은 322야드까지 날아갔다. 3번 우드로도 같은 조 서형석의 드라이버 샷 거리를 앞설 때도 있었고 아이언으로 거의 270야드를 보내기도 했다.
상금 1위였던 서요섭은 7언더파 공동 24위, 디펜딩 챔피언 문도엽은 8언더파 공동 20위로 마쳤다. 베테랑 양용은과 최호성은 3언더파 공동 50위를 기록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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