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의 효시로 박정희 정권 시절 중화학공업의 기틀을 마련한 오원철(사진)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30일 오전7시 별세했다. 향년 91세.
오원철 전 제2경제수석비서관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옆에서 9년간 경제수석으로서 정책보좌를 했다.
고인은 지난 1960∼19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당하며 한국 경제 개발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제2경제수석비서관 근무 당시 박 전 대통령에게 “경제발전 중심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국내 공업단지들 대부분은 오 전 수석의 청사진에서 밑그림이 그려졌다. 중화학공업기획단 단장을 맡아 창원을 비롯해 울산·온산·구미·여수 등 전국 6개 산업기지 조성을 직접 지휘했다. 이를 계기로 창원시 1호 명예시민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이라는 비밀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오일쇼크’ 때 중동 진출을 기획했다.
행정수도 이전도 맡아서 추진했지만 박 전 대통령 서거와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업무수행 능력이 탁월해 박 전 대통령이 창원공단 시찰을 마친 뒤 ‘국보’라고 칭찬한 일화도 있다.
기술관료로서 미국식 경제원리에 치우치지 않고 독립적인 노선을 걸었다는 평을 받는다.
고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화학공업과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군 기술장교후보생으로 입대해 소령으로 예편했다. 시발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을 지내다가 1961년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과 연을 맺었다. 그해에 상공부 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상공부 공업제1국장, 차관보를 거쳐 1971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됐다.
1980년 신군부 쿠데타 때 권력형 축재 혐의로 체포되며 공직에서 물러났다. 12년간 대외활동을 못하다가 1990년대 들어서야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이후 7권짜리 대작 ‘한국형 경제건설’과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등의 책을 펴내고 박정희 일대기를 정리했다. 2009년에는 서거 30주년을 맞아 영문 자서전 ‘더 코리아 스토리’를 출간했다. 여기서 그는 경제대국 건설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유신 체제를 옹호했고 10·26은 부마사태 해결방법을 두고 대립하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재하던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오범규 명지대 교수와 딸 오인경 전 포스코 상무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6월1일 오전7시30분이다. 장지는 경기도 가평군 선영으로 정해졌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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