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점심 무렵 서울 동작구 노량진 고시촌에서 만난 한 남매는 고향 강원도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설 명절을 보냈다. 누나인 원모(29)씨는 보건공무원 시험을 2년째 준비 중이고 남동생 원모(26)씨는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지 이제 2개월이 지났다. 남매는 이번 설에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했지만 합격증으로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동생 원씨는 “부모님께 합격증을 보여드리기 위해 설에도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공시족을 서럽게 만드는 건 밥이다. 설 연휴 식당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이들은 주린 배를 햄버거로 채웠다. 점심을 해결하러 나온 공시족들로 패스트푸드점은 꽉 찼다. 9급 공시생인 조윤재(27)씨는 “따뜻한 밥 한 끼가 간절하지만 4월 학원 정규 과정을 끝내려면 이번 설을 고시촌에서 보내야 한다”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이들에게는 잠시의 여유도 사치였다. 5급 공시생인 이모(30)씨는 햄버거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이어폰을 꽂고 정리 노트를 읽기 바빴다. 대학 때부터 6년 동안 시험을 준비한 그는 “친척들이 응원해 주지만 마음이 가볍지 않다”며 “고시 준비를 너무 오래 하니 친척들 보기가 민망하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갈수록 높아지는 경쟁률에 이들은 설 연휴도 반납하고 공부하고 있다. 경찰 공무원 준비생인 심규빈(25)씨는 “올해 시험이 두 번 있지만 경쟁률이 높아 쉽지 않다”며 “주변에서는 여유를 가지라지만 부모님이 취업을 재촉해 압박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했다. 식사 중에도 그의 눈길은 영어 문제집을 떠나지 않았다.
신림동 고시촌의 설 연휴 풍경도 비슷했다. 카페 곳곳은 인터넷 강의를 듣거나 수험 서적을 읽는 이들로 가득했다. 5급 공시생인 김모(32)씨는 “지난 명절에 이어 올해도 친척들을 보지 않고 곧장 신림동으로 왔다”며 “자격지심이 들고 스스로 초라해져서 창피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일부 수험생은 합격 전까지는 자신을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말해 씁쓸함을 자아냈다. 서울 본가를 두고 신림동에서 자취 중인 이모(26)씨는 “설은 가족들이 모이는 자리”라면서도 “이는 수험생인 내겐 해당 안 되는 얘기”라고 했다.
/서종갑·백주원·방진혁·이희조기자 gap@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