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선(先) 영변 핵시설 폐기-종전, 후(後) 핵 신고’라는 중재안을 내놓으면서 적절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강 장관의 비핵화 구상에 대해 “너무 앞서나간 것 아니냐”는 다소 비판적인 견해가 나온다. 우선 핵 신고를 미뤄둘 경우 비핵화 협상의 핵심인 완전하고 불가역적이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CVID)의 실현이 어려워진다. 비핵화 조치는 대개 ‘신고→사찰→검증→불능화 →폐기’ 단계로 이뤄진다. 이 중 신고는 대상시설 목록, 설계정보, 운영기록 등 핵 활동에 대한 검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검증이 없다면 북한의 핵무기 규모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쉽지 않다. 그간 한미가 비핵화 해법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던 CVID 원칙을 깨면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히는 자충수를 뒀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울경제신문 펠로(자문단)인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핵 신고 없이는 제대로 된 비핵화 검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신고·검증을 뒤로 미루고 종전선언이나 제재 완화를 하면 이를 다시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북한이 반드시 신고·검증 방안을 내놓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변 핵시설 폐기에 따른 상응조치인 종전선언도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대한 명분을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외교가에서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상응조치로 미국의 종전선언 참여를 강조하는 이유는 주한미군 철수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미국의 군사전문가인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이 평화적 환경 조성을 위해 종전선언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남북 양국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미국의 종전선언 참여를 고집하는 것은 미군이 더 이상 한국에 주둔할 이유가 없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강 장관의 중재안을 미국이 받지 않을 경우 비핵화 협상과 관련한 한미공조가 약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강 장관의 구상은 미국이 주장하고 있는 CVID와 배치되는 것은 물론 미국의 양보를 주장하고 있어 한미 간 뇌관으로 작동할 우려도 크다. 서경 펠로인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강 장관의 발언은 마이크 폼페이오의 4차 방북에 앞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미국 측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한편 북한에는 한국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일거양득의 전략으로 판단된다”며 “우리 정부가 양측이 만족하는 안을 내야지 한쪽만 유리하게 하는 중재안을 내는 것을 미국이 받을지는 미지수”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어 “미국이 중재안을 받지 않으면 한미관계만 역설적으로 부작용이 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우리 정부가 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꼬집었다.
/박우인기자 wi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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