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한국의 성장을 상징하는 이 문구는 비단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기도 그렇다. 군사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군수물자를 해외에 양도하는 구도가 굳어지고 다품종 대량 공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자리 잡고 군축으로 이어질 경우 우방국에 전략적으로 양도하는 무기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오래됐거나 필요도가 떨어진 불용 군 장비의 해외 공여는 크게 세 가지 부수 효과가 있다.
첫째, 쓰지도 않는 장비를 보관·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관리비용의 절감이 가능하다. 둘째, 외교관계가 더욱 공고해질 수 있다. 셋째, 헌 집을 주다 보면 새 집을 제값 받고 파는 기회도 늘어날 수 있다. 지난 2007년 공군이 곡예비행팀 ‘블랙이글스’를 비롯해 30년을 운용하고 퇴역시킨 A-37B 공격기 8대를 페루에 무상 공여한 결과는 KT-1 훈련기 수출로 이어졌다. 특히 주목할 국가는 1993년 해외 원조의 스타트를 끊은 나라인 필리핀. 고속정에 이어 F-5A/B 8대 수출로 시작된 군사관계는 국산 초음속 경공격기인 FA-50 12대 수출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FA-50 필리핀 수출형의 분류 명칭은 FA-50PH로 필리핀은 12대를 추가로 구매할 계획이다. 필리핀이 국제입찰을 실시한 차기 호위함 2척 구매 사업도 현대중공업이 따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과 필리핀 두 나라의 군사교류는 더욱 다양하게 진행될 예정이다. 필리핀은 점증하는 중국의 위협과 이슬람 반군 세력의 도전에 직면한 상태로 군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필리핀은 미국산 다연장로켓시스템(MLRS)에 관심을 가졌으나 가격에 막힌 상황. 마침 군사 전문가들이 ‘과도한 성능과 가격의 MLRS가 아쉽지만 한국산 로켓의 성능도 뛰어나다’는 의견을 개진해 성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에 넘어갈 구룡(K136A1)은 육군용 1개 대대(18문)분으로 필리핀 해병대가 추가 도입할 가능성도 남아 있다. 구룡은 우리 군에서도 현용 장비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장비지만 신형 다연장 ‘천무’ 시스템이 양산되고 있어 숫자가 줄어도 군의 전력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육군은 구룡보다 강력한 천무 시스템을 구룡의 기존 수량보다 훨씬 많이 배치할 계획이다.
숫자로는 여전히 육군 병력 수송용 헬기의 주력인 UH-1H 헬기도 양도 목록에 올랐다. 7대가 공여될 것으로 알려졌다. 동종 기종 28대를 보유한 필리핀은 기동력 강화를 위해 어떻게든 숫자를 늘리려고 독일 등과 협상했으나 미진한 상태다. 독자 개발 모델인 수리온 헬기의 전력화로 기존의 UH-1H 대대들이 수리온 대대로 전환해 UH-1H 중고기체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다만 이 헬기의 일부는 미국의 군사원조에 따른 우호 가격으로 넘겨받은 기체도 있어 필리핀이든 어느 국가든 제3국에 양도하려면 미국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퇴역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해군의 참수리급 고속정과 포항급 초계함도 양도 대상이다. 필리핀 해군은 한국에서 공여받은 학생급과 참수리급 고속정 초기형을 대체할 참수리급 후기형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공여받은 중고 함정을 새로운 한국산 중고 함정으로 대체하는 셈이다. 포항급 초계함은 이미 은퇴한 충주함이 양도될 예정이다. 중형 전투함이 많지 않은 필리핀으로서는 요긴한 전력이다.
공군도 넘길 품목이 있다. T-103 기초훈련기. 러시아에서 불곰사업(차관을 무기로 대신 상환받은 사업)으로 2006년에 들어온 T-103은 국내 고유모델인 T-100에 밀려 조기 퇴역한 상태다. 필리핀 공군은 노후한 T-41 훈련기를 대신하는 기종으로 T-103을 원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필리핀이 운용 중인 T-41 14대는 미국에서 1966년 생산된 기체를 한국이 1972년에 원조받아 T-103 도입과 함께 퇴역시킨 기종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넘겨받은 중고 항공기를 한국에서 넘겨받을 중고 항공기로 바꾸자는 것이다.
신규 구매도 있다. 단가가 가장 높은 FA-50PH를 12대 추가 구입하겠다는 의향을 여러 번 밝혔다. 지난해 5월부터 10월까지 이슬람 반군과 5개월 동안 마라위 전투를 벌이며 필리핀군은 정밀폭격을 비롯한 FA-50PH의 성능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후속 군수지원에 만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형 험비’로 불리는 신형 소형전술차량과 6륜형(바퀴 6개) 장갑차를 수입할 의향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육군도 채택하지 않은 경전차 역시 수출이 가능한 품목이다. K-21 보병전투차의 차체를 활용해 105㎜ 또는 120㎜ 저압포를 장착한 포탑을 앉힌 경전차는 밀림이 우거진 필리핀의 작전환경에서 중전차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105㎜ 견인곡사포를 대형 차량에 적재하고 탄도 계산기, 사격통제장치를 개선한 105㎜ 자주곡사포도 목록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의 빠듯한 국방 예산으로 이같이 다양한 종류의 신형 무기를 구매하기 어려워 한국의 금융지원을 요청할 것으로 전망된다.
뜻밖의 수출 후보지도 있다. 한국과 피를 흘리고 싸웠던 베트남은 울산급 호위함을 원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샹그릴라 대화’ 일정을 마치고 베트남을 방문하는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양국 간 국방협력을 논의하며 장비 양도에 대해서도 견해를 나눌지 주목된다. 태국과 말레이시아도 구축함 또는 잠수함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는 방위산업의 활로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으나 환경은 우호적이지 않다. 일본이 잠에서 깨어나 중고 군사장비들을 헐값이나 공짜로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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