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타 차로 쫓긴 14번홀(파3). 추격자는 한국 선수의 우승 길을 가로막는 일이 잦았던 ‘천적’ 크리스티 커(40·미국)였다. 커는 13, 14, 16번홀에서 1타씩을 줄여 역전을 넘봤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선두 지은희(32·한화큐셀)와 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리막인 14번홀에서 7번 아이언으로 친 볼이 홀 앞 50㎝ 정도 되는 지점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며 내리꽂혔고 서서히 굴러 홀과 깃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환상적인 홀인원으로 단숨에 3타 차로 달아나며 사실상 우승을 확정한 장면이었다.
어느덧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한국군단의 ‘맏언니’가 된 지은희가 부활한 지 5개월 만에 다시 한 번 날아올랐다. 지은희는 26일(한국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칼즈배드의 아비아라GC(파72·6,558야드)에서 열린 KIA클래식(총 상금 180만달러) 4라운드에서 5타를 줄여 최종합계 16언더파 272타로 정상 고지를 밟았다. 공동 2위 커, 리젯 살라스(미국·이상 14언더파)를 2타 차로 따돌렸다. 우승상금은 27만달러(약 2억9,000만원).
지은희는 고교 2학년 때이던 2003년 당시 전성기였던 박세리와 국내 대회에서 경쟁 끝에 아마추어 신분으로 준우승하며 이름을 알린 선수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두고 2008년 미국 무대에 진출한 그는 2008년 웨그먼스 대회에 이어 2009년 메이저인 US 여자오픈을 제패해 차세대 여왕 자리를 예약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후 2010년부터 시작한 스윙 교정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저 그런 선수의 길을 걸었다. 뛰어난 후배들에 밀려 ‘잊힌 이름’이 될 뻔했던 지은희는 지난해 10월 기어코 다시 일어났다. 타이완 챔피언십에서 무려 8년3개월 만에 정상에 복귀한 것. 이어 5개월 만에 개인 통산 4번째 우승을 보태면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다. 또 6개 대회를 치른 LPGA 투어 2018시즌에서 한국 선수의 합작 승수를 3승으로 늘렸다. 미국 선수와 균형을 맞추며 맏언니의 역할도 한 것.
김인경(30·한화큐셀), 살라스와 함께 공동 선두로 최종라운드를 시작한 지은희는 10번홀까지 버디만 5개를 뽑아내며 순항했다. 다른 선두권 선수들이 주춤한 사이 1타 차 공동 4위였던 커가 추격해온 상황에서 마법 같은 홀인원을 터뜨리면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홀인원 결정타’로 줄인 2타는 결국 공동 2위와의 타수 차로 마무리됐다. 지은희는 우승상금 외에 부상으로 걸린 기아자동차 세단 스팅어, 홀인원 부상인 소렌토까지 자동차 2대도 한꺼번에 챙겼다.
지은희는 경기 후 “(홀인원을 한) 14번홀에서 전날 7번 아이언으로 친 티샷이 멈춘 지점이 오늘 홀 위치와 비슷했다”고 돌아보며 “세계 1위가 가장 큰 목표이며 메이저대회에서 또 우승하고 싶다”고도 밝혔다.
지은희의 우승에 후원 업체들도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한·미·일 투어에서 10승을 합작한 한화큐셀 골프단은 일본 투어 이민영(26)의 개막전 제패에 이은 소속선수의 이번 시즌 두 번째 우승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지은희의 ‘부활 도우미’로 알려진 드라이버 샤프트는 국산 업체 두미나골프의 오토파워 제품이다. 올해 아이언 사용계약을 맺은 미즈노골프는 특히 지은희의 홀인원에 쾌재를 불렀다. 김인경은 13언더파로 공동 4위에 올랐고 각각 올해 LPGA와 KLPGA 투어 유력한 신인왕 후보인 고진영과 최혜진은 나란히 11언더파 공동 10위로 마쳤다.
/박민영기자 my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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