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가 ‘러시아 스파이’ 암살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하기로 했다. 이는 단일 사건 추방 가운데 최근 30년래 가장 큰 규모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14일 오전(현지시간) 국가안보위원회 회의에서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로 이 같은 방안을 강구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가 제시한 시한까지 러시아 정부가 혐의를 부정하자 메이 총리가 고강도의 보복 조치를 꺼내 든 것이다.
메이 총리는 또 영국인이나 거주민들의 생명이나 재산을 위협하는 데 사용된 증거가 있는 러시아 자산을 동결하고 위협을 줄 수 있는 러시아인 입국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및 왕실은 러시아월드컵을 보이콧하고 러시아와 예정된 모든 고위급 회담도 중단할 방침이다. 메이 총리는 “러시아의 추가 도발이 있으면 다른 제재 조치를 검토할 예정”이라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행동에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영국에서 러시아 이중간첩 출신인 세르게이 스크리팔과 그의 딸이 영국의 한 쇼핑몰에서 미확인 물질에 노출된 뒤 쓰러진 채 발견된 후 영국과 러시아 간 갈등이 격화돼왔다. 메이 총리는 12일 하원에 출석해 “피해자들은 러시아가 개발한 군사용 신경작용제 ‘노비촉’의 공격을 당했다”며 러시아 정부를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13일 자정까지 러시아 정부의 공식 입장표명을 요구했다.
푸틴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의문사한 인물의 친구마저 런던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분위기는 더 악화됐다. AFP통신은 12일 저녁 런던 남쪽 뉴몰든에서 러시아 출신 니콜라이 그루시코프(69)가 사망한 채 발견됐다고 전했다. 그는 2013년 자택 욕실에서 목을 매 숨진 러시아 재벌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친한 사이였다. 베레좁스키는 푸틴 대통령의 올리가르히(신흥재벌) 척결 과정에서 쫓겨나 2001년부터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러시아의 모든 주요 사건과 범죄의 배후에는 푸틴이 있다”고 비판해 크렘린의 표적이 됐다.
미국·독일·덴마크가 영국의 결정을 지지한 데 이어 유엔도 영국의 편을 들고 나서면서 러시아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국제기구가 스파이 암살 사건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하며 공식 문제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줄리언 브레이스웨이트 주제네바대표부 영국대사는 이날 유엔인권이사회(UNHRC) 총회에서 “전직 러시아 스파이를 군사용 신경작용제로 암살하려 한 시도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며 국제사회에 경고를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권이사회와 유엔 총회는 그동안 러시아의 지속적인 국제법 위반을 비판해왔다”며 “이번에 발생한 무자비한 사건은 인권이사회가 상징하고 지지하는 가치에 대한 모욕”이라고 밝혔다.
잇따른 국제사회의 비판에 러시아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런던 주재 러시아대사 알렉산드르 야코벤코는 이날 영국 스카이뉴스TV채널과 인터뷰하면서 “영국 정부가 취한 모든 조치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도발로 간주한다”고 주장했다.
/박홍용기자 prodig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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