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조명이 어두운 아이스링크를 밝힌다. 얼음을 지치는 소리는 시원하고 퍽이 날아가는 소리는 경쾌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아이스하키 선수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타고 있고 양손에 스틱을 쥔 채 한 손으로는 썰매를 밀고 한 손으로는 퍽을 날린다. ‘장애인 아이스하키’를 뜻하는 파라 아이스하키 선수들이다.
오는 9일 개막하는 2018평창동계패럴림픽 대회에 맞춰 제작된 ‘우리는 썰매를 탄다’는 파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태극마크를 단 국가대표라고 당당히 말하기에는 사실 어색하고 쑥스럽다. 선수층이 워낙 얇은 탓에 국내 유일의 실업팀인 강원도청 소속 선수들이 대부분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턱없이 열악한 환경이지만 이들은 창단 6년 만인 2012년 IPC(국제패럴림픽위원회) 월드챔피언십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국제대회 참가비가 부족해 선수들끼리 돈을 거둬 일궈낸 쾌거다. 이들은 곧 열리는 평창동계패럴림픽에도 참가해 그동안 연마한 실력을 뽐내려고 벼르는 중이다.
‘우리는 썰매를 탄다’는 파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이 써낸 기적의 드라마를 핵심 줄기로 삼고 흘러간다. 은메달을 획득하는 순간을 마지막 장면에 배치한 뒤 그들 앞에 놓인 역경을 극복하는 분투의 과정을 차곡차곡 기록한다. 크게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흐름이고 전개다.
하지만 감독이 시종일관 승리의 서사에만 골몰해 관객의 감동을 억지로 유도하려 했다면 이 작품은 흔해 빠진 다큐멘터리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영리하게도 ‘우리는 썰매를 탄다’는 고난 끝에 승리가 기다리는 스포츠 다큐멘터리의 공식을 따라가는 척하면서 중간중간 끊임없이 샛길로 빠진다. 서사가 가지치기를 통해 본류(本流)를 벗어난 자리에서 관객들은 선수들의 평범한 일상사와 마주한다. 누군가는 “최근에 여자친구가 생겨 살 맛이 난다”고 함박웃음을 짓고, 또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된 과정을 담담히 전한다.
IPC 대회 가운데 한국의 조별 예선전이었던 노르웨이·이탈리아와의 경기만 상세히 묘사하고 정작 준결승 승리와 결승전 패배 소식은 짤막한 자막으로 처리하는 연출은 인물의 일상에 주력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보통의 다큐멘터리와 달리 이 작품은 틈틈이 끼어드는 인터뷰 영상에 인물의 이름을 알려주는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인물들의 일상을 차례로 비추며 마치 존경 어린 헌사를 바치듯 이름을 하나씩 화면에 띄운다. 스포츠를 통해 일상의 소중한 의미를 되찾은 이들은 이미 금메달리스트나 다름없다고, 삶을 예찬하고 긍정할 줄 아는 이들의 태도는 우리 모두가 함께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감독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충무로의 노(老)거장인 임권택 감독과 함께 ‘서편제’, ‘춘향뎐’, ‘취화선’ 등 수많은 명작을 남긴 태흥영화사가 제작했고 TV 다큐멘터리 연출자로 활동해 온 김경만 감독의 영화 데뷔작이다. 7일 개봉. /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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