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만남 직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미국을 겨냥해 치열한 기싸움을 벌여왔다. 앞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특사 겸 평창동계올림픽 고위대표단으로 방남했던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우리 정부의 주선으로 성사됐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의 청와대 경내 회동을 2시간 앞두고 펜스 부통령의 대북강경 행보를 문제 삼으며 일방적으로 회동을 취소했다. 이후 북측은 미국과의 대화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강경 메시지를 공공연히 내놓기도 했다.
그러던 북측의 태도가 25일 돌변한 데에는 우선 국제사회와의 공조 속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대 강도로 수위를 높이고 있는 대북제재·압박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 23일(현지시간) 북한에 대한 해상차단이라는 초고강도 카드를 꺼내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일 미·호주 정상회의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해상차단 등) 그 제재가 효과가 없으면 우리는 제2단계로 가야 할 것”이라며 “(2단계는) 매우 거친 것이 될 수도 있고 전 세계에 매우 매우 불행할 수도 있다”고 말해 만약의 경우 대북 군사대응까지 할 뜻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중재 및 남북관계 개선 전략은 한층 탄력을 받게 됐다. 통일부도 이날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 진전 가능성이 기대되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남북관계의 추가적 개선을 위해서는 북미대화 등 비핵화 과정에서의 진전이 필요하며 북미대화 진입을 지원·견인하면서 필요 시 주선·중재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26일이 남북미의 3각 외교 성사 여부에 중대 시점이 될 수도 있다. 폐회식 참석차 방한했던 이방카 트럼프 대통령 보좌관 등 미국 측 대표단이 당일 본국을 향해 출국할 예정인데 그 이전에 북미 대표단과의 실무자급 탐색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기 때문이다. 아울러 26일에는 김영철 부위원장 등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우리 정부의 고위급 당국자들과 청와대 이외 장소에서 실무 차원의 비공개 회동 내지는 회담을 할 가능성도 크다. 회동 성사 시 우리 측에서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조명균 통일부 장관, 혹은 서훈 국정원장 등이 나설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측이 김여정 제1부부장 및 김영철 부위원장 방남에 대한 답방 차원의 특사파견 일정을 논의하거나 남북 군사회담 및 문화·체육관광·인도적 분야 교류 추진 여부를 의제로 올릴 여지도 있다.
그러나 실제 북미 대화 성사 및 남북관계 발전이 이뤄지려면 북한이 수용해야 하는 대전제가 있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대화의 ‘입구’로 천명한 상태인 반면 북한은 아직 이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핵개발이 부친의 유훈이고 자신의 취임 후 최대 위업으로 내세운 사안인 만큼 단기간에 포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만약 핵 동결 및 핵 폐기 수용 가능성을 내비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청구서를 요구하거나 한미합동군사훈련 및 주한미군 규모의 축소나 철수 등을 주장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특히 평창 패럴림픽까지 마친 후인 오는 4월 한미가 합동군사훈련을 재개할 경우 북측이 저강도 군사 도발을 재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만약 북한이 북미 대화 등의 조건으로 수용 불가능한 청구서를 내민다면 위장평화전술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북한의 유화 제스처가 미국의 제재·압박 국면에 틈을 벌려 시간을 벌면서 미국 본토를 겨냥하는 핵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개발을 완성하고 한미동맹에도 균열을 일으키려는 기만행동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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