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가정용 대형 세탁기 수입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이 조치는 사실 미리 예견된 수순이다. 미국은 지난 2013년 한국 및 멕시코산 세탁기에 대해 반덤핑 조치를 내린 바 있다. 이에 삼성과 LG는 각각 중국 쑤저우와 난징을 대미 수출기지로 활용했다. 미 정부는 2017년 1월 중국산 세탁기에 대해 고율(38~57%)의 반덤핑 조치를 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그러자 삼성과 LG는 대미 수출기지를 중국에서 태국과 베트남으로 옮겼으며 미국이 이번에 발동한 세이프가드는 캐나다와 일부 지정된 개도국들을 제외하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 수입하는 세탁기라도 제재 대상에 포함해 수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미국 내 세탁기 제조 업체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러스트 벨트’에 해당하는 오하이오·켄터키·미시간·위스콘신주에 위치하고 있다. 트럼프 진영이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지층 결집을 위해 근본적 보호조치를 선사한 셈이다. 앞으로 선거정국으로 빠져들수록 세탁기를 넘어 가전제품 일반, 그리고 제조업 전반으로 무역구제 조치가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우리 정부는 이번 세이프가드 조치가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상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함을 근거로 ‘WTO 제소’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세이프가드 조치를 한 WTO 회원국이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 일방적 무역 보복을 실시할 수 있다는 WTO 세이프가드 협정 규정을 근거로 ‘보상 요구 및 보복’ 수순에도 돌입했다. 이와 병행해 2016년 9월 승소한 WTO 세탁기 반덤핑 관련 패널 판정을 미국이 아직도 이행하지 않는 사실을 내세워 ‘WTO 승인하에 무역 보복’을 실시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대응방안으로 미국에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것은 좋으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첫 번째 WTO 제소 카드는 무기력하다. 트럼프 정부는 이미 미국의 국가이익에 반하는 WTO 판정은 이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16년 반덤핑 관련 판정도 이행하지 않고 있는 미국이 세이프가드 판정을 자발적으로 이행할 리 만무하다. 불이행국에 대해 WTO의 승인 아래 무역 보복을 실시할 수는 있으나 대미 무역 보복이 한미 안보협력 관계에 미칠 여러 가지 부작용을 고려하면 보복이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두 번째 보상 요구 및 보복 수순은 이번 사안에 적용될 수 없다. WTO 세이프가드 협정은 ‘절대적 수입량 증가’를 이유로 부과한 세이프가드 조치에 대해 상대국이 초기 3년간 보복을 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우리 세탁기의 대미 수출 물량은 2012년 160만대에서 2016년 320만대로 절대 물량이 증가했다. 이번 미국의 세이프가드 조치는 3년 동안 취하는 것으로 고안돼 있어 보복당할 위험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애초의 보상 요구가 미국에 먹힐 리 없음도 의미한다.
세 번째 카드 또한 한계가 있다. 현재 정부는 미국이 반덤핑 분쟁 패널 판정을 이행하지 않아 발생한 대미수출 차질액을 7억1,100만달러로 계산해 WTO에 보복 승인을 요청한 상태다. WTO 무역 보복의 목적은 상대국에 판정을 이행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데 있다. 현재 트럼프의 정치 행태를 감안하면 우리의 대미 무역 보복이 실제로는 제조업 전반으로 무역구제 조치를 확산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우리의 대응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미국 국제무역법원(CIT)에 우리 기업들이 제소해 승소 판정을 받아내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사법부 우위의 전통이 지배하는 미국 헌법 구조상 대통령이 사법부의 판정을 이행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CIT에 국제교역 이슈를 제소해 승소한 사례가 많지 않기는 하나 최근 현대제철이 내후성강 제품에 대한 반덤핑 조치를 재계산하도록 판정을 이끌어내는 등 우리 기업들이 부분적으로라도 승소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협력해 CIT 소송에 필요한 여건을 조성하고 중국·태국·베트남 정부와도 협력해 국제적인 여론 형성으로 미국을 압박하는 작업을 병행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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