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배우 김보애 선생은 한때 ‘한국의 메릴린 먼로’라고 불렸다. 화장품 업계 최초로 모델에 발탁될 만큼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분이었다. 내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물한 분이다. 그분과 함께 두 번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다. 부음을 접하고 낡은 앨범을 뒤져보니 평양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꽤 많았다. 그는 배우이자 남북 문화교류 사업의 선구자였다. 직접 MBC에 찾아와 남북합동공연(민족통일음악회)을 준비하고 있는데 연출은 주철환 프로듀서(PD)가 맡으면 좋겠다고 콕 집어 요청한 분이다. 그분 덕에 ‘내 인생의 10대 뉴스’에는 항상 평양 방문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지난 1999년 12월20일 오후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공연한 민족통일음악회의 추억은 사진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다. 신문에도 몇 차례 기고해 세기말 평양 모습의 단면을 생생하게 전했다. 기록은 기억을 부활시키는 힘이 있다.
그날 오후6시 ‘역사적’인 공연이 끝났다. 녹화된 내용물을 서울에 전송해야 하므로 나는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조선중앙방송위원회로 향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눈앞에 벌어졌다. 방송사 건물에 완전히 어두운 정적만 흐르고 있던 것이다. 순간 ‘거대한 사기극에 휘말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라이터 불에 의지한 채 위성실로 걸음을 옮기던 중 전기가 들어왔다. PTS 방식으로 직접 평양과 서울의 음성교신도 이뤄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내게 북측 공연담당인 김일남 연출가가 손을 꽉 거머쥐며 한 마디를 던졌다. “주 선생,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습네까.”
걱정이 사라지니 감격이 몰려왔다. 나는 졸지에 평양의 조선중앙TV에서 북측 방송인들과 밤을 새운 최초의 남측 PD가 된 것이다. 송수신이 벌어지는 동안 남과 북의 방송인들은 고려호텔에서 배달된 용성맥주를 들이켜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술을 따라주는 김 연출가를 ‘선배님’이라고 부르며 서울에 오면 잘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송출이 끝나고 방송사를 걸어 나오는데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김 연출가는 “우리 집에 가 한잔 더 하자”고까지 했지만 그 아름다운 제안은 이뤄지지 않았다.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 예술단이 선수들과 함께 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통일이 되면 국가경쟁력이 엄청나게 높아질 거라고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남북 사이에 화해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 ‘협력(協力)’이라는 두 글자에는 ‘힘(力)’이 무려 네 개나 포함돼 있다. 힘 하나로는 어림없다는 얘기다.
천사의 3형제가 감사·찬사·봉사라면 문화의 3형제는 대화·변화·평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화로 변화를 모색하고 나아가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 문화의 목표라는 뜻이다. 만약 평양문화재단이라는 곳이 있다면 나는 ‘통 큰 협력’을 한번 제안해보고 싶다. 정치·경제로는 어려운 길을 문화로 연결해보자는 기획이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봉화예술극장에서 내가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 당시 북측 협상 파트너이던 아태평화위원회의 김정철 참사가 들려주던 위로의 말을 기억한다. “주 선생, 일은 일그러져도 정은 얼그러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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