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수대예술단
고용희는 김일성에 의해 창설된 북한 만수대예술단에서 1969년 무용가로 첫발을 뗐다. 중앙당 직속인 이 예술단은 김정일이 예술부문을 맡은 뒤부터 갑자기 주목을 받았다. 김정일은 현장지도란 이름으로 하루에 서너 차례 방문한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최고 지도자의 눈에 띄기를 원해 예술의 길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늘게 마련이었다.
만수대는 대동강 서안 구릉 지대에 위치한 높이 60m 건물로 극장과 기숙사, 식당과 탁구장도 있었다. 예술단원의 급료는 월 70원으로 최고 학부인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은행원과 같은 수준. 그녀는 1970년대 후반 김정일의 눈에 띄었고 김정일은 그 후 외부 비공개인 연습실까지 찾아올 만큼 열성이었다.
고용희는 또렷한 이목구비에 키가 크고 화려한 인상으로 이미 호평을 받고 있었다. 한 단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목을 받고 있던 당시 그녀가 예술단에 나타나지 않아 김정일과 동거설이 불거졌다.
◇ 김정은의 재일교포 출신 어머니
북한 지도자가 된 김정은의 어머니에게는 고영희·고전희·고희훈·고영자라는 몇 개의 이름이 더 있다. 성씨만 남긴 채 자기를 괴롭히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이름을 때때로 바꾼 걸까. 고씨는 제주도에 많고 고용희의 고향도 이곳이다.
제주도는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해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화산섬. 지금이야 국내외로부터 연간 1,500만명이 찾아오는 관광지이지만 화산성 토양이 농업에는 맞지 않아 주민들은 오랫동안 가난한 생활을 해왔다.
제주도 국제공항에서 차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30분 정도 달리면 제주시 조천읍에 도착한다. 남서쪽 멀리 거뭇거뭇한 한라산이 보인다. 주변에는 연달아 자리한 묘지 가운데 제주 고씨 신성악파의 선조 묘가 있다. 언론이 고용희와의 관계 때문에 이 묘를 집중 보도했기 때문에 지금은 다른 장소로 이장했다.
◇ 피의 길
고용희가 김정일의 네 번째 새로운 아내로 주목을 받으면서 그녀의 내력에 관해 다른 사람과 혼동도 생겼다. 그 가운데 국가정보원이 2006년 12월 22일 “고용희는 제주도 출신 고경택의 딸”이라고 발표했다. 그 발표를 실마리로 추정해보면 고용희의 가족도 더 잘살기 위해 일본으로 이주한 전형적인 제주도민의 모습이었다.
고경택은 제주도의 묘지에 매장돼 있는 고영옥(1876년생)의 아들로 1913년 8월 14일에 태어나 1929년에 일본에 건너갔다. 당시 제주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배의 정기항로도 없었다.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배를 타고 건너간 사람은 1923년에 모두 3,000명 정도로 가장 많았던 1933년에는 약 3만명. 여자는 당초 해녀가 중심이었지만 방적공으로, 남자는 직공으로 취직했다.
1936년 통계에 따르면 제주도 총인구는 19만5,278명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신은 4만6,000여명으로 제주도 총인구의 약 24%. 네 명당 한 명꼴로 일본에 건너간 셈인데 대부분이 오사카에 자리를 잡았다. 고경택이 택한 곳도 오사카. 그는 군수공장인 히로다 봉제소에서 일했는데 당시 조선인 노동자의 급여는 일본인보다 낮았다.
고경택도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가는 것이 별 볼 일 없었지만, 희망이 없는 고향 섬보다는 나았을 터. 일본 생활 20년을 넘긴 1952년 6월 26일(일부에선 1953년 6월 16일이란 얘기도 있음) 딸 고용희가 태어났다. 이미 일가에는 오빠가 있었고 그 후 여동생도 생겨 가족은 5명이 됐다.
◇ 귀국사업이란
고용희가 귀환선을 타게 된 것은 기타츠루하시 소학교에 다니던 11세 때. 북한 귀국사업은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동포가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가 돼 1959년 12월부터 1984년 7월까지 이뤄졌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건너온 사람은 모두 10만명이 넘었다.
러시아제 선박으로 북한의 항구마을 원산에 도착하자마자 귀국자들은 가슴이 콩닥거렸다. 마중 나온 현지인들 복장이 생각보다 초라했기 때문. “이 나라에서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고용희의 심사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에서의 생활은 적어도 일본에서 말하는 ‘천국’과는 딴판이었다. 재일동포는 현지 말로 체차로 불려 경계했는데 체차란 ‘소자’(小者)를 뜻하는 은어다. ‘체포’라는 은어도 있다. 재일동포의 줄임말로 ‘재포’라는 의미지만 ‘교활한 나라 일본에서 건너온 인간’ ‘자기만 좋은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이기주의자’라는 부정적 뜻이 담겨있다. 그들은 북한으로 건너온 뒤 이등국민 취급을 받았다. 호적 출신성분 난에는 ‘귀국자’라고 쓰여 당 간부와 사법·외교·항공·해운 부문에는 채용되지 않는 근거가 되었다.
◇ 재일귀국자를 애인으로
일본에서는 민족학교에 가지 않고 츠루하시 소학교에 다녔던 고용희는 귀국 후에는 평양에서 고등중학을 졸업하고 평양음악무도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재학 중 북한에서 최고 수준이라 불리는 무도조에 뽑혔다. 만수대예술단의 후배인 신용희는 “고용희는 이목구비가 분명한 얼굴로 키가 크고 스타일도 좋은 미인이었다. 춤을 잘 추고 무대에서 인상도 화려해서 주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나는 김정일의 춤꾼이었다’에서)고 털어놨다.
고용희를 처음 본 김정일은 만수대예술단의 훈련실에 가끔 얼굴을 내밀게 됐다. 그녀는 만수대예술단에서 가극 ‘조국의 진달래’의 주역으로 발탁돼 단편영화 ‘눈이 내린다’에도 출연했다. 김정일은 고용희가 20세 되던 1973년 8월 만수대예술단을 일본에 처음 보내 전국공연을 하게 했다. 그녀는 ‘유일숙’이라는 가명으로 단원들 사이에 섞여 12년 만에 고향에 발을 디뎠다.
◇ 조선화보가 드러낸 것
고용희의 북한 생활은 우연히 기록되었다. 북한 선전용 잡지 조선화보가 1973년 고경택 일가를 소개하는 기사를 사진과 함께 게재했다. 북한이 발행한 ‘조선화보’ 3월호에 재일조선인 귀국자의 근황을 알리는 ‘고경택씨 일가’ 기사였다. 거기 실린 사진에서 ‘영자’는 고용희였고 얼굴도 그 후 공개된 그녀와 같다.
‘행복이 넘치는 나의 집’이라는 기사에는 자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고경택 일가의 사진이 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책상에 앉아 있고 카디건을 입었는데 학자 같은 풍모. 그 앞 테이블 주변에 성인 여성 두 명과 사내 아기가 사진에 찍혀있다.
기사는 고경택이 자기 인생을 말하는 내용. “제주도 뱃사공의 삼남으로 태어나 1929년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갔다. 오사카에 도착한 그날부터 인간 이하의 모욕과 학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민족적 차별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직해 생활이 어려워졌다”고 쓰여 있다. “지금은 나와 같은 행복한 가정은 없다”며 김일성 주석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어지는 페이지에 고용희가 나온다. “장녀 영숙이 대학에 가는 날, 차녀 영자가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훈장을 받는다는 통보가 왔다.” 72년 12월 노동신문에는 훈장을 받은 예술단원 가운데 고용희라는 이름이 게재돼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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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최근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를 좌지우지하는 핵심인물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당위원장이라 하겠다.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섬뜩한 말 폭탄 주고받기로 긴장과 전쟁 위기감을 키우는 두 사람. 다소 진정국면이지만 여전히 ‘선전포고 주장’까지 나오는 일촉즉발 험악한 형국이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 김정동 사장이 번역서 출간에 앞서 콘텐츠 사용에 대해 양해를 해줬다. 일부 수정을 거쳐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쥬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올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지난 2013년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 6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