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한 사드 하리리 레바논 총리가 사우디와 이란 간 힘겨루기로 요동치는 중동 정세에 ‘태풍의 눈’으로 부각되면서 국제사회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고 있다. 사우디에 의한 강압적인 사임과 구금·억류설 등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하리리 총리는 지난 4일 사임 발표 이후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아 갈등의 불씨는 갈수록 커지는 양상이다.
11일(현지시간)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셸 아운 레바논 대통령은 하리리 총리가 사우디에서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한 상황에 대해 해명이 필요하다며 그가 귀국해 이유를 밝힐 때까지 사의 수용 결정이 미뤄질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리리 총리의 사임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면서 국제사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성명에서 “레바논 안팎의 모든 주체는 레바논 국가기관의 유지·독립을 존중해야 하며 미국은 강력한 파트너로서 하리리 총리를 존중한다”면서도 “레바논 정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하리리 총리가 레바논으로 돌아가 사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외교부도 “우리는 하리리 총리가 행동에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레바논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갑작스럽게 타국에서 사임을 발표해 사우디와 레바논 간 갈등에 불을 붙인 뒤 두문불출 중인 하리리 총리는 이란의 레바논 정치 개입에 반대하다 암살당한 부친의 뒤를 이어 2005년 레바논 정계에 뛰어들었다. 사우디의 지원을 받으며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수니파 세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그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와 지속적으로 대립해왔다. 지난해에는 헤즈볼라와 손잡은 아운 대통령 후보를 지지해 내각을 꾸렸지만 헤즈볼라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면서 사우디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BBC방송은 레바논에서 정치적 균형이 깨지며 시아파 세력이 세력을 키워가자 사우디가 하리리 총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전했다. 특히 하리리 총리가 사임 하루 전인 3일 수도 베이루트에서 이란 최고지도자의 국제문제 자문인 알리 아크바르 벨라야티와 면담하며 결정적으로 ‘미운털’이 박혔다고 지적했다. 미 주요 통신사도 “하리리 총리가 이란과 헤즈볼라의 영향력 확대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에 기우는 모습을 보이자 사우디가 그를 사퇴시켰다는 설이 있다”고 전했다.
주요 외신들은 하리리 총리의 사임을 둘러싸고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가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사우디가 하리리를 레바논 정치판에서 제거함으로써 레바논을 이란의 전초기지로 취급하는 것이 쉬워졌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실제 하리리 총리의 사임 발표 직후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트위터에 “레바논=헤즈볼라, 헤즈볼라=이란, 이란=레바논”이라고 올리기도 했다.
/박민주기자 park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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