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7시 가정폭력 가해자로 의심되는 한 남성이 서울의 한 피해자보호시설로 찾아왔다. 남성은 활동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설입구까지 들어와 “자녀 얼굴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시설 관계자가 수차례 남성을 퇴거 조치해 달라고 경찰에 요구했지만 경찰 관계자는 “범법행위를 하지 않는 이상 혐의적용이 어렵다”며 오히려 자녀와 만남을 종용했다. 결국 시설 관계자는 현수막으로 가해자의 시야를 가리는 동안 시설 입소자들을 차에 태워 대피시켰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돌보기 위한 임시보호시설이 2차 피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경찰마저 소극적으로 대응해 시설 내 피해자들은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경찰이 임의동행·긴급임시조치 등 법률에 따라 대응할 수 있지만 ‘가해자 중심 사고’ 탓에 소극적으로 조치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국 67개소 가정폭력 임시보호시설은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를 둔 국가지원 시설이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과 아동의 긴급 피신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주소를 철저히 비공개로 하지만 가해자가 미행·협박·수소문 등으로 주소를 알아내 찾아오는 경우가 잦다. 실제로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에 따르면 가정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보호시설을 찾아와 위협하는 사례는 연간 134~201건에 이른다.
이 때문에 현행법은 경찰 직권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소극적인 대응만 이뤄지고 있다.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신고받은 경찰은 긴급상황에서 피해자와 가정구성원(자녀)의 주거지·직장 등에서 100m 이내 접근금지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2일 현장을 방문한 경찰은 “가해자에게 가정폭력 전과가 없고 난동을 피우는 등 이상행동을 하지 않아 격리조치 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시설 관계자는 “피해자 신고가 들어와 조사한다고 임의동행하거나, 긴급임시조치를 취하는 등 방법은 많았다”고 맞받았다.
가정폭력 현장대응 경찰 매뉴얼에서도 경찰은 시설 연락처를 누설해서는 안 되고 가해자가 찾아가 2차 피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여성의전화가 10일 공개한 사례에 따르면 일선 경찰들이 오히려 가해자 신고를 받고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시설 소재지를 알려달라고 하거나 비밀을 누설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올 9월 김모(33)씨도 남편 폭력을 피해 세 자녀와 함께 시설로 피했다가 경찰 전화를 받았다. 해당 경찰은 “남편이 자녀 납치로 신고했다. 납치가 아니라면 시설 위치를 알려달라”며 수차례 소재지를 추궁했다. 시설 관계자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이기 때문에 주소를 알려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경찰이 가해자 부탁을 받고 시설 위치를 물어보는 일이 잦다”고 전했다.
허순임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상임대표는 “많은 경찰이 가해자 민원제기를 염려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며 “가정폭력을 가해자 중심 사고로 인식해 사적인 일로 치부하는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는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다은기자 down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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