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시대이지만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이면서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의 시대이면서 불신의 시대였다. (중략)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우리 모두 천국을 향했고, 우리 모두 정반대 방향의 지옥을 향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이다. 디킨스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된 계급 불평등, 귀족 계급의 부패와 도덕적 해이, 시민의 궁핍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부모의 경제적 몰락으로 하층민의 삶을 살았던 디킨스는 대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파리의 곪은 상처를 적나라하게 들추며 런던의 문제를 직시했다.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심각해지는 실업 문제, 빈부 격차와 소득 불평등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다.
요즘 경제학자들은 홍콩과 싱가포르의 엇갈리는 성과를 두고 ‘두 도시 이야기’의 제목을 빌려 비교하고는 한다. 지난 1970년대 이후 엄청난 성장을 거듭한 이들 도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성적표를 내놓았다. 싱가포르는 연평균 6%대의 성장률을 보이는 반면 홍콩은 4%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구매력평가 기준)에서 싱가포르는 이미 홍콩을 추월했고 청년 일자리도 완전고용 수준에 근접하며 부러움을 한 몸에 사고 있다. 결정적 원인으로는 ‘제조업’이 지목된다. 싱가포르는 1970년대 이후 20~30%의 제조업 비중을 유지해온 반면 홍콩은 1980년대 20%에 달했던 비중을 3% 이하로 확 줄이며 ‘탈(脫)제조업’을 선언했다.
제조업에 방점을 찍은 싱가포르는 여기에 ‘혁신’의 옷까지 입혔다. 리셴룽 총리가 2년 전 ‘스마트네이션’ 정책을 발표했는데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을 실생활과 개별 산업에 접목한다는 것이 골자다. 싱가포르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곧 제조업 혁신’이라는 등식이 성립돼 있다.
우리는 어떠한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싱가포르·홍콩·대만과 더불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린 대한민국이다. 하지만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저출산·고령화, 저성장의 덫에 사로잡혀 급기야 ‘경제성장률 3% 달성’에 목을 매는 상황에 놓여 있다.
2014년 ‘제조업 혁신 3.0 전략’을 선보였지만 뚜렷한 성과가 없다. 4차 산업혁명과 제조업을 접목하겠다는 발상이었지만 구체화한 액션플랜은 턱없이 부족했다. 문재인 정부가 ‘네 바퀴 성장론’을 내걸었지만 각 바퀴의 크기와 용도가 다른데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냐’는 회의론이 벌써 나온다. 혁신 성장에 이니셔티브를 갖고 정책을 끌고 가야 할 중소벤처기업부는 수장 자리가 비어 있고 밑그림을 그려야 할 4차산업혁명위원회 역시 최근에야 닻을 올렸다.
새 정부가 ‘혁신 성장’의 중심축을 벤처 창업에 두면서 기존의 ‘제조업 생태계’를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뼈아픈 지적도 흘러나온다. ‘제조업 혁신 전략 없는 성장 전략은 허상’이라는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할 때다. 디킨스가 ‘어리석음의 시대’라고 갈파한 그 도시의 비극이 언제든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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