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 작가는 한국문학의 ‘제2의 물결(Second wave)’을 주도하고 있는 소설가입니다.”
“다음 작품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에요. 그동안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도전입니다.”
국제 문학 에이전트이자 소설가인 바바라 지트워는 강연과 차기작 취재 등을 위해 최근 방한했다. 영미권과 유럽 독자들은 지트워 덕분에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 문학이 일군 절경(絶景)을 함께 만끽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경숙과 공지영, 정유정, 김애란 등의 작가들이 모두 지트워의 ‘중개’로 해외 각국의 독자들을 만났다.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것 역시 지트워였다. 그는 오는 16일 경기도 군포시의 초청으로 특별강연을 진행한다. ‘세계 속의 한국 문학의 위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강연에서 지트워는 소설가 정유정의 흥미로운 행보를 집중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문학을 매개로 우정을 쌓아가고 있는 정유정과 지트워가 지난 7일 서울 미근동 서울경제신문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여성의 삶과 문학의 역할, 차기작에 대한 고민 등 여러 소재를 오가며 두 시간 넘게 열띤 대화를 나눴다.
‘7년의 밤’,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정유정은 여전히 리얼리즘 경향이 강한 한국 문단에서 ‘족보’ 없이 홀로 빛나는 존재다. 범죄 소설의 외양을 취하면서도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에 가 닿는 그의 문체는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의 구분을 상투적이고 무의미한 도식으로 만든다.
지트워는 “정유정과 같은 여성 스릴러 작가의 존재 자체가 한국 문학의 축복”이라며 “정유정이 남성이었다면 ‘종의 기원’처럼 긴장감 넘치는 소설 안에 모성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결코 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한국 여성문학의 1세대 선두주자가 신경숙이라면 2세대의 맨 앞자리엔 정유정이 서 있다”며 “정유정의 작품을 접하고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를 읽었을 때 느낀 짜릿함을 오랜만에 맛보았다”고 돌이켰다.
거듭되는 지트워의 극찬에 정작 정유정은 “특별히 여성 작가라는 정체성을 의식하며 작품을 쓰지는 않는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정유정은 “솔직히 이전까진 ‘여성’ 그 자체보다는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작품의 실마리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며 “여성 공동체를 품격 있는 문체로 그린 지트워의 소설 ‘J.M.배리 여성수영클럽’은 ‘젠더 감수성’에 대해 새롭게 고민해 보는 기회가 됐다”고 화답했다.
지난해 지트워가 대표를 맡고 있는 에이전시를 통해 해외 각국에 판권이 팔린 ‘종의 기원’은 내년 6월부터 미국과 유럽 서점에 깔린다. 지트워는 “한국 독자들이 그랬듯 영어권에서도 이전에 본 적 없던 새로운 스릴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며 “외국에선 ‘Good son’이라는 아이러니 가득한 제목을 달고 출간된다”고 귀띔했다.
두 사람은 다음 작품의 얼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지트워와 정유정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차기작을 구상 중이란다. 지트워라면 놀랍지 않다. 여성 작가를 주로 발굴하고 있고 작품 테마 역시 여성의 연대와 우정에 천착해 온 작가니까.
하지만 정유정이라면 의외다. 정유정이 그리는 파국의 드라마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언제나 주변을 맴도는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그는 “사실 여성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여성의 감정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다 보니 작가와 캐릭터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기 힘들었어요. 저 스스로 여성 캐릭터에 깊이 감정이입 되면서 캐릭터의 입을 빌려 떠들고 싶은 욕망이 샘솟더라고요. 이걸 깨달은 순간 실력과 내공을 갖추기 전까진 ‘거리 두기’가 가능한 남자 캐릭터를 소설의 중심에 세우자고 결심했어요.”
정유정은 지난 2013년 출간된 소설 ‘28’에서 김윤주와 노수진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그리며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자료 조사를 끝내고 이제 막 새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며 “여성이 주인공일 뿐 아니라 스릴러라는 틀로 쉽게 규정하기 힘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내게도 새로운 도전”이라고 전했다.
지트워는 “뉴욕 여성과 한국 여성이 만나 우정을 나누는 스토리를 준비하고 있다”라며 “오랜 친구인 신경숙 작가와 작품 취재를 위해 제주도의 해녀를 만나러 곧 떠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동안 주로 여성작가 발굴에 집중해 왔던 지트워지만 앞으로는 성별에 관계없이 재능 있는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하고 싶단다. 그는 “김중혁과 김언수를 눈여겨 보고 있다”며 “그들의 작품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처럼 장쾌하고 재기발랄하다”고 칭찬했다.
“한강·편혜영 등의 소설을 번역하고 출간해 세계 각지에서 그들의 작품이 안착하는 걸 확인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습니다. 저는 원래 고객을 많이 두는 에이전트가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한국의 보석 같은 작가를 전 세계 독자들에게 충실히 알리는 ‘브릿지’ 역할을 할 거예요.”
/나윤석·정혜진기자 nagija@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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