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만드는 이들에게 ‘이야기꾼’이라는 별명만큼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을까. 극작가 겸 연출가인 장우재(46) 극단 이와삼 대표에겐 늘 ‘이야기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지나치기 쉬운 작은 소재로, 웃고 떠들고 눈물짓는 사이 삶과 세상을 성찰하게 하는 탓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신자유주의와 도덕, 윤리 등 거대 담론이 담기지만 그의 서사는 거대하지 않다. 성실하게 빚어낸 인간 군상들의 일상과 고뇌를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좋은 이야기에는 답이 없다”는 믿음 탓이다.
20대 초반 데뷔 때부터 대학로에서 주목받았던 장 대표지만 연극계에선 2010년 영화판에서 돌아온 이후 그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스크린에 걸리지도 못했던 영화와 달리 ‘여기가 집이다’(2013), ‘환도열차’(2014), ‘햇빛샤워’(2015), ‘불역쾌재’(2016) 등 무대에 올린 작품들이 연달아 히트했고 2013년 대한민국연극대상 대상, 2014년에는 동아연극상 희곡상 등 내로라하는 상을 휩쓸었다.
그런 그가 신작 1편, 재연작 1편을 들고 돌아왔다. 2년 만에 재연하는 국립극단의 ‘미국 아버지’(9월 6∼25일 명동예술극장)는 극본과 연출, 신작 ‘옥상 밭 고추는 왜’(10월 13∼29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극본을 맡았다.
국립극단을 통해 2년만에 재연하게 된 ‘미국 아버지’는 2004년 5월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에 의해 공개 참수된 첫 희생자 미국인 닉 버그 가족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당시 닉 버그의 아버지 마이클 버그는 아들을 잃은 뒤 개인적 고통을 넘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세계인이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 점을 적은 A4 두 장 분량의 편지를 영국의 전쟁 반대 단체에 보냈는데 편지 내용은 이역만리 한국 땅에 있던 한 극작가에게 큰 충격을 줬다.
5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 대표는 “‘왜 삶을 공정하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제시해줄 만큼 내 삶에 굉장한 영향을 준 사건이었고 반드시 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무대에 올리기까진 10년이 걸렸다”며 “세계 곳곳에서 테러가 일어나는 지금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닉 버그의 참수 사건과 마이클 버그의 편지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모두 허구로 채워넣었다. 사회 활동가로 변모한 마이클 버그와 달리 그를 모델로 한 빌은 끝내 살아남지 못한다. 극의 마지막엔 두 사람을 대비시키며 관객을 사유의 공간으로 이끈다. 그는 “마이클 버그라는 사람이 어떤 힘으로 그런 편지를 쓰고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 자신의 삶을 견디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장 대표는 “사건의 특성상 호소하고 격앙되기 쉽지만 이제는 호소와 격앙만으로 이 사건을 다룰 시기는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번 무대는 호소, 과장, 반복을 걷어내고 신자유주의, 전쟁 등에 대해 정확하게 우리가 무엇을 사유해야 할지 전달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 선보일 신작 ‘옥상 밭 고추는 왜’에선 김광보 서울시극단 단장과 11년만에 호흡을 맞춘다. 김 단장과 장 대표는 1994년 ‘지상으로부터 20미터’의 연출가와 작가로 함께 데뷔했다. 이후에도 ‘열애기’(1997), ‘악당의 조건’(2006) 등을 통해 최고의 호흡을 자랑했던 두 사람이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셈이다.
“김광보 연출에게서 오는 전화는 주로 놀랍습니다. 현란하고 미학적인 포인트를 묻는 게 아니라 아주 기초적인, 그러나 행간에 숨겨진 팩트를 포착해 질문을 하는 겁니다. 사실 배우들을 움직이는 근거는 구체적인 팩트죠. 헛구역질하는 장면 하나가 나와도 그걸 왜 하는지 파고들어 연출하는 겁니다. 행간을 파악하는 건 관계를 파악하는 건데, 관계를 파악하면 자연스럽게 행간이 생기고 관객에게 상상과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죠. 김 연출은 놀라운 경지에 이른 거죠.”
‘옥상 밭 고추는 왜’는 서울 변두리 동네의 한 연립빌라 옥상의 밭에서 키우는 고추를 몰래 따 간 이웃과 벌어지는 다툼을 그린 작품이다. 실제 장 대표가 살던 연립 옥상 고추밭에서 고추 싹쓸이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착안해 인간관계의 도덕과 윤리 의식의 충돌을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연극의 소스를 세상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대로다. 장 대표는 “우리나라는 개인이 없는 집단을 공동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 개인이 되지 못한 공동체주의자들이 망쳐가고 있는 사회라는 표현(김규항)을 본 적이 있다”며 “도덕과 윤리가 거대하게 충동하는 문제들이 생활 곳곳에서 보여주는 시기인 만큼 필요한 얘기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매년 한 편의 신작을 내놓는 그지만 올해는 극단의 작품 활동을 단기와 장기 트랙으로 나눠 즉각적으로 사안을 담아내는 연극을 시도해볼 계획이다. 극단 공동창작으로 11월에 선보일 이 작품의 가제는 ‘버려야 할 욕망과 진화시켜야 할 욕망’이다. 장 대표는 “극단에서 공연을 만들던 중 연출이 갑자기 사라지는데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단원들이 느끼는 다양한 욕망을 꺼내볼 계획”이라며 웃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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