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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 동냥그릇을 든 동상

조은정 한남대 교수





일본의 강압으로 불평등한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바로 그해 8월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동김씨 김순영의 집에서 오랜만에 태어난 한 아이는 이른바 7대 독자였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된 김구(1876~1949) 선생이다.

1896년 일본인 중위 쓰치다를 명성황후 시해자로서 처단한 김구 선생이 체포돼 해주감영에 구속됐다가 인천으로 옮겨지자 그의 부모는 전답을 정리해 옥바라지에 나섰다. 이듬해 김구 선생은 사형언도를 받았지만 고종황제 특사로 화를 면했다. 하지만 석방이 되지 않자 탈옥했는데 이에 연루됐다 해 그의 부모는 3개월간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그 후에도 김구 선생에 대한 가족의 후원은 지속됐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1859~1940) 여사는 남편과 사별 후에도 삯바느질과 남의 집 찬모를 해가며 아들의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22년 중국으로 가서 임시정부와 함께한 그녀는 김구의 어머니이자 모든 독립군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데 어긋남이 있으면 아들이든 젊은 독립운동가이든 단호하게 회초리를 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고 동냥을 얻어 아들인 자신에게 가져다 먹인 어머니가 늘 애틋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늘 오가던 인천 길에 어머니 동상을 세우기를 희망했다. 아마도 어머니가 그를 낳은 생일에 맞추려고 했던 것 같은데 동상 건립은 1949년 8월에 맞춰 추진됐다. 동상은 서울에서 경기상업학교, 경기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낸 박승구(1919~1995)가 제작했다. 그런데 동상의 생김새는 멋지지도, 이상화한 모습도 아니었다. 옷은 남루하며 치마허리를 질끈 동여매 속바지가 드러나고 오른손에는 바가지를 들고 서 있다. 동냥 다니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각한 것이다. 하지만 동상이 완성되기 2개월 전에 김구는 안두희가 쏜 흉탄에 서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69년 3월 ‘백범 김구 흉상(胸像)’이 발견됐다. 역시 박승구가 만든 것으로 석고상이었다. 박승구는 김구 선생의 데드마스크를 1949년 6월26일에 제작했던 터였다. 김구 선생의 흉상 발견은 동상 건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대대적으로 위인의 동상을 건립한 애국선열조상위원회가 선정한 ‘선열’의 반열에 들지 않아 자칫 동상 하나 없을 뻔한 ‘김구 동상’이 서게 된 것은 이런 역사적인 발굴 덕이었다.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는 김구 선생과 곽낙원 여사 동상이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우아하고 기개 넘치는 동상들 목록에서 곽 여사 동상은 너무나도 사실적이어서 마음을 끈다. 중국의 시장이 문을 닫으면 쓰레기장에서 시래기를 주워와 죽을 끓여 독립군을 먹인 어머니,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을 다하는 아들, 그에 이은 손자까지 돌본 올곧은 여인의 기상은 허름한 옷차림 밖으로 빛을 발한다. 동상을 세우는 목적은 다양할 수밖에 없으나 그 인물됨을 나타내는 데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동냥 바가지를 든 노파의 모습이 아들이 기억하는 어머니라는 사실은 놀랍다. 곽낙원과 김구, 바로 그런 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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