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거듭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북핵’은 뉴스의 키워드가 됐다. 나아가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이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나날이 긴장이 고조되고 우발적 상황 전개에 따라 전쟁의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다.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일 쏟아지는 북핵과 관련한 뉴스를 접하면 우리는 전시 상태에 사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미국과 북한이 내놓는 말을 보면 전쟁이 임박하지 않았냐는 추측을 낳을 정도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한을 겨냥해 “더 이상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세계 어디서도 보지 못한 분노와 화염에 직면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분명 전쟁과 군사 행동이라고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분노와 화염이 그와 비슷한 어감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지난 8일에 ‘미국은 현 상황에서 극히 신중해야 하며 충돌을 유발할 수 있는 어떠한 군사적 행동도 특별히 삼가야 한다’는 제목의 전략군 대변인 성명에서 괌 미국 기지에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북핵은 미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연관된 복잡한 문제다. 특히 우리로서는 북핵이 전쟁으로 비화한다면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에 관심과 인내를 갖고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자백가들이 활약했던 춘추전국시대도 전쟁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통계자료로 살펴보면 춘추시대(기원전 722~464년)에는 1년에 약 5개국이 서로 전쟁을 벌였고 ‘좌씨전(左氏傳)’의 기사(기원전 722~468년)에는 전쟁이 모두 531회, 즉 연평균 2회 이상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두 데이터를 종합하면 1년에 약 5개국이 두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오죽했으면 ‘싸우는 나라들’을 뜻하는 전국(戰國)시대라고 명명을 했겠는가.
전쟁의 관점에서 제자백가 사상을 검토하면 각자의 뚜렷한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 상앙은 전쟁을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입장을 비판하고 전쟁만이 전쟁을 그칠 수 있다는 ‘이전식전(以戰息戰)’의 논리를 펼쳤다. 이 논리에 따라 상앙은 국가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병가로 유명한 손자는 전쟁에 대해 상당히 신중한 주장을 펼쳤다. 전쟁이 한 번 일어나게 되면 엄청난 물자를 사용하게 되고 인명의 희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하기 이전에 승리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덮어놓고 전쟁부터 벌이는 모험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소진과 장의를 위시한 종횡가는 전쟁의 시대에 외교의 가치를 발견했다. 약소국이 혼자 상대와 싸우면 불리하지만 동맹을 맺으면 강적과 함께 맞설 수 있다. 그들은 오늘날 외교에 해당하는 택교(擇交)라는 말을 만들어가면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나라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맹자는 명분과 대의가 없이 개인과 집단의 야욕과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전쟁을 배격했다.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데도 전쟁을 일으킨다면 다른 나라들이 동맹을 맺어 해당 국가를 응징해야 한다며 오늘날 유엔평화유지군과 같은 구상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전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전쟁을 일으킬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자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을 주장했다. 사랑과 평화를 내세우면 맞서 싸우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칼과 칼이 부딪치는 상황에서 사랑 타령을 한다며 맹자의 비현실성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북핵에 대해 유엔의 결의가 점차 수준을 높여가는 것에 주목해보라. 국제사회가 유엔 결의안에 찬성을 던지는 것은 북핵이 인자무적의 논리를 위반했기 때문이다. 대의의 정당성을 갖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이웃과 친구의 지지마저 잃게 될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북한은 국제사회의 규범을 준수하지 않으며 대결과 모험을 일삼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핵무기로 평화를 사려고 할 것이 아니라 평화로 평화를 가꾸는 인자무적의 논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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