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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수 서옥렬씨 "56년째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광주·전남의 마지막 비전향장기수 서옥력(90)씨는 ‘남파간첩’이라는 이유로 29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 뒤 북한에 있는 아내와 두 아들에게 가려했으나 정부가 전향수라며 북송을 제한했다. 그는 56년간 가족과 떨어져 광주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할 처지에 놓였다.

서씨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안좌면이다. 5남 1녀 중 장남이다. 고려대 경제학과에 수학 중이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서씨는 학도병으로 북한 인민군에 편입돼 참전했다. 남·북한 정부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합의했다. 서씨도 같은 해 11월 제대했다. 이후 북한 내 강원도의 한 중학교에서 그는 교원생활을 하며 여성 교원과 결혼했다. 1955년 12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수학했다. 졸업 후 평양의 간부양성소에서 일했다. 그 사이 아들 태길(1956년)씨와 태현(1958년)씨를 낳았다.

서씨는 1961년 8월 남쪽의 고향으로 홀로 내려왔다. 고향 가족들과 짧은 만남을 가졌다. 월북하던 서씨는 동생들을 포섭하고 정보 수집 등 첩보 활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국내 보안당국에 붙잡혔다. 서씨는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2심에서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90년까지 29년 동안 복역했다. 공직과 교직에 있던 서씨의 동생들은 사실상 연좌제로 모두 쫓겨났다.

1993년 비전향장기수 이인모(2007년 사망 당시 90세)씨의 송환 이후 2000년 비전향장기수 63명이 송환됐지만 서씨는 전향수로 분류된 탓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수년간 못 만났던 가족을 만났을 뿐인데 사형·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도 억울한데 유신시대에 (정보당국이) 깡패들을 동원해 반강제로 준서약서에 직인을 찍게 했다”고 말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 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강압과 고문에 의한 전향은 무효’라는 판단을 내림에 따라 북송을 희망하는 전국의 비전향장기수 27명과 함께 송환 촉구 운동을 펼쳐왔다. 광주 시민사회는 심장질환 등으로 고통받는 구순 노인 서씨가 죽기 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25일 ‘장기구금양심수 서옥렬 선생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추진위는 추석과 10·4 남북 정상선언 10주년을 앞두고 이산가족 상봉 및 장기수 송환을 촉구했다. 추진위는 청와대·통일부에 편지를 보내고 온·오프라인 상에서 송환청원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김민제 인턴기자 summerbreez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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