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세자 양녕의 폐위, 충녕은 형의 왕위를 넘봤나?’ 편이 전파를 탄다.
‘조선 최초의 폐세자’로 기록된 형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훗날 세종대왕이 되어 조선 왕조 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기록된 동생 충녕대군(忠寧大君).
한 순간에 뒤바뀐 형제의 운명! 형제간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양녕 폐위의 도화선, 어리 스캔들. 양녕은 왜 충녕을 배후로 의심했나?
세자가 노하여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양녕대군을 세자 폐위에 이르게 한 중심에는 그의 애인, 어리가 있었다. 태종(太宗)의 극심한 반대에도 양녕대군과 관리의 첩 어리는 비밀 만남을 이어가고 결국 둘은 아이까지 갖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크게 분노하고, 폐세자 사건의 도화선이 된다. 그런데 이 때, 양녕대군이 자신과 어리 사이의 일을 아버지께 고자질한 인물로 의심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충녕대군 훗날의 세종대왕이다. 양녕대군의 폐위에 충녕대군은 과연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 양녕 vs. 충녕, 형제간에 깊어진 갈등의 골
“세자가 일찍이 임금 앞에서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용맹하지 못한 듯하나, 큰일에 임하여 대의(大疑)를 결단하는 데에는 당세에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다’” - 태종실록, 태종 16년 2월
1402년, 9세에 원자로 책봉되어 조선의 첫 번째 세자가 된 양녕대군. 그러나 그의 하루는 오로지 학습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혹독한 세자 교육에 양녕대군은 엇나가기만 하고 서연(書筵)에 나가지 않는 등 공부를 게을리 하였다. 반면 동생 충녕대군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대조적 행보를 보인다. 어느덧 조정 대신들은 물론이고,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 양녕대군을 동생 충녕대군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잘난 동생 때문에 늘 스트레스가 심했던 양녕대군. 급기야는 아버지 태종에게 충녕의 단점을 고하기에 이르는데.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전국고민자랑 <안녕하세요>의 터줏대감인 컬투의 정찬우, 김태균의 사연 소개로 인생이 힘들다는 조선시대 세자, 양녕대군의 고민을 나눠본다.
▲ 동생 충녕은 과연 형의 왕위를 넘보았나?
1418년 6월 3일, 태종(太宗)은 14년간 세자 자리를 지켰던 양녕대군를 폐위하고 동생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사실 태종이 확고하게 신봉했던 적장자 승계 원칙에 따르면 양녕대군의 첫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진 이를 골라야 한다’는 ‘택현(擇賢)’의 논리로 양녕의 아들이 아닌 동생 충녕이 세자가 된다. 과연 충녕의 힘이었을까?
[사진=KBS 제공]
/서경스타 전종선기자 jjs737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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