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가 점차 지능화·고도화되면서 과학수사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과학수사의 일선에 있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경찰과 함께 대검찰청 국가디지털포렌식센터(NDFC)도 지능·첨단범죄 대응에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특히 문서 감정, 영상 분석, 디지털·DNA 포렌식 등은 NDFC만의 차별화된 강점이다. 이에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NDFC의 과학수사를 통한 사건 해결 과정을 소개한다.
“여기서 뭘 건질 수나 있을까”
현장에 도착한 대검찰청 과학수사부 감정관들은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범행 현장으로 추정되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 위치한 샌드위치 패널 구조의 건물은 화재로 대부분 소실된 상태였다. 경찰의 감식을 피할 목적으로 피의자가 감식 3시간 전에 자신의 주거지에 인화성 물질을 뿌리고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건물 일부는 화재로 붕괴됐고 화재 진압 과정에서 검게 그을린 가재도구들은 마당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 경찰과 과학수사 요원들이 다녀간 곳에서 추가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시신 없는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이른바 ‘화성 육절기 살인사건’에 대한 대검 과학수사부의 현장 정밀감식은 이후 세 차례 더 이어졌다.
60대 여성의 실종 신고로 시작된 이 사건은 피해자의 사체를 냉동육 절단용 기계인 육절기를 이용해 훼손한 뒤 유기한 사건이다. 목격자도 없고 사체도 발견되지 않아 미궁으로 빠질 뻔한 사건이었다. 경찰 역시 피의자가 살해범이라는 것을 직감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해 건물방화 혐의만으로 구속해 놓은 상태였다.
실제 시신 없는 살인사건은 유죄율이 극히 떨어진다. 누가 죽였는지는 물론 실제 피해자가 살해됐는지를 동시에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검찰은 대검 과학수사부에 정밀 감정을 요청했다.
감정관들은 일단 보이는 것들을 수거했지만 범죄 현장이 크게 훼손돼 핵심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이때 화장실에 있는 하수 배관이 감정관들의 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은 피의자가 피해자를 살해한 후 육절기로 시신을 훼손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화재로 화장실에는 증거가 남아있지 않았지만 땅속에 묻혀있던 배수관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검찰은 유족들의 동의를 받고 굴삭기를 동원해 배수관을 파헤쳤다. 모습을 드러내 배수관은 즉시 대검 과학수사부로 옮겨져 조직 검사와 항원·항체 반응 검사를 받았다. 정밀 분석 결과 피해자의 DNA와 혈흔이 검출됐다. 범행 현장이 화장실이었다는 게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첫 번째 퍼즐이 맞춰지자 나머지 조각들도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경찰서 주차장에 4개월여 동안 방치됐던 피의자의 트럭 뒷좌석에서도 혈흔을 찾아냈다. 타액·혈흔·정액 등의 흔적을 찾는데 사용되는 ‘크라임라이트’라고 불리는 법광원을 이용하기 위해 초여름 날씨에 트럭에 천막을 씌우고 땀을 쏟아내며 3시간 동안 사투를 벌인 결과였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범행 도구인 육절기 톱날과 본체에서 핵심 증거가 나왔다. 특히 고물상에 버려졌다 발견된 육절기 본체는 대검 과학수사과로 공수된 후 부품 하나하나를 분해하며 정밀 감식에 나선 결과 육절기 전체에서 피해자의 혈흔 반응과 DNA가 95곳 이상 발견됐다. 육절기에서 떨어져 나온 이물질에서는 피해자의 근육, 섬유성 조직, 피부, 뼈, 지방조직, 체모가 추가로 발견됐다.
DNA 분석실에서 살인 여부가 입증될 때쯤 ‘계획적 살인’의 증거도 나왔다. 피의자가 방화를 하기 직전 들고 나온 컴퓨터를 입수한 검찰은 컴퓨터 법의학이라 불리는 디지털 포렌식 수사에 나섰다. 그 결과 인터넷 검색기록에서 ‘인체해부도’, ‘육절기’ 뿐 아니라 고기분쇄기인 ‘민찌기’ 등을 검색한 기록이 나왔다. 또 ‘해부학 동영상’ 등을 통해 사체 해부 방법을 학습한 정황도 드러났다.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적 살인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과학적 증거로 혐의가 충분히 입증되면서 검찰은 피의자를 살인 및 사체유기죄로 추가 기소했다. 대법원은 “원심이 채택해 조사한 증거들을 살펴보면 원심의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판단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단하며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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