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9일 어떤 대선후보가 정권을 잡더라도 정권 초기에 여소야대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새 대통령과 국회가 유기적으로 협력관계를 구축하지 않으면 집권 초기부터 국정운영에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인사청문회는 물론 시급하게 다뤄져야 할 법안들이 국회 대치로 마냥 미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도 예상할 수 있다. 한국 정치사를 반추해보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과거 여소야대 사례를 분석해보면 협치의 미를 살렸을 때 무난하게 초기 국정을 잘 이끌 수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여소야대 상태에서 협치 이끌어=노태우 전 대통령은 양김(김영삼·김대중) 분열로 지난 1987년 대선에서 대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정의당의 낮은 지지도가 국정운영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됐다. 1988년 13대 총선 결과 여당이었던 민정당은 299석 중 125석, 야 3당인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의석은 각각 70석, 59석, 35석으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됐다. 하지만 13대 국회는 청문회 도입, 지방자치법 제정, 국정감사제도 부활 등 굵직한 성과를 거뒀다.
여기에는 ‘물태우’라는 비아냥을 받았던 노 전 대통령의 의지가 한몫했다. 노 전 대통령은 민정당 원내총무(현재 원내대표)였던 김윤환 의원을 통해 김원기(평민당), 최형우(통일민주당), 김용채(신민당) 총무 등과 물밑교섭을 펼쳤다. 여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고 실세였던 정호용 의원을 국회의원직에서 해임한 ‘5공화국 청문회’ 합의가 도출됐다. 노 전 대통령이 김윤환 의원에게 전권을 주며 “나의 신념은 ‘참용기(참고 용서하고 기다리자)’다”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DJ, DJP 연합으로 여소야대 정국에서 IMF 위기 돌파=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사상 최대의 국난을 맞이한 상황에서 집권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DJP연합의 합의대로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경제각료 임명권을 그에게 넘겼다. DJ는 JP가 일본·중국 등으로 출장 갈 때 대통령 전용기를 내주기도 했고 부처 업무보고 때도 그를 동반하게 했다. 새천년국민회의(103석)와 자민련(55석)의 연립내각은 이후 내각제 개헌 무산으로 파국을 맞게 되지만 IMF 위기였던 집권 초기에는 원만하게 운영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역사상 첫 정권 교체로 대통령에 오른 상황인 만큼 경제 브레인이 부족했다. 이때 JP의 추천으로 재정경제부 장관에 이규성, 금융감독위원장에 이헌재를 발탁했다. 이들은 호남 출신이었던 진념 기획예산위원장,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과 함께 경제정책을 주도했다. 당시 경제팀은 이규성의 리더십, 강봉균의 기획력, 이헌재의 추진력이 정교하게 맞물려 IMF 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원동력이 됐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강공개혁 일관하다 탄핵위기=노무현 전 대통령은 ‘노풍’으로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지만 대선까지의 여정은 가시밭길이었다. 민주당 내 반노 의원들은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발족해 노무현 후보에게 단일화를 압박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단계적으로 탈당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바른정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 탈당 사태와 닮은꼴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당선 직후 대북 송금 특검을 승인해 민주당 핵심 인사들의 큰 반발을 샀다. 이때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취임 7개월 만에 민주당을 탈당했다. 여당에서 야당이 된 민주당은 17대 총선을 앞두고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을 이유로 한나라당·자민련과 연대해 대통령 탄핵을 의결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야당과의 협조나 공조 없이 무리하게 개혁을 추진하다 국정운영 동력을 상실했다./우영탁기자 ta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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