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는 일본어 오타쿠(御宅)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일본에서 1970년대 등장한 ‘오타쿠’는 집에 틀어박혀 자신의 취미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우리식 조어인 ‘덕후’도 같은 의미다. 여기서 파생한 ‘덕질’은 좋아하는 분야에 빠져든 일련의 행동이요, ‘입덕’은 덕질의 시작, ‘덕업일치’는 덕후의 관심사가 직업이 된 경우를 뜻한다. 다양한 신조어는 그만큼 덕후 문화가 우리 사회에 파고들었음을 시사한다.
화가 신창용은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영화 ‘킬빌’의 특정 장면을 그리고 또 그리는 덕후가 됐다. “타란티노 덕질에 빠진 덕후가 그린 그림”이라며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덕화(畵)’라 부른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영화·음악 등을 소재로 대중과의 소통을 꾀하는 작업을 해왔다. 작가 장지우는 일본의 서브컬처 중 하나인 특수촬영물, 일명 ‘특촬물’ 덕후다. 주인공이 영웅으로 변신해 악당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특촬물 특유의 이야기구조를 가져와 촬영한 그의 작품 ‘지우맨’ 프로젝트에서는 현실을 탈피하고자 영웅을 상상하는 청년세대의 목마름이 엿보인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덕후 프로젝트:몰입하다’는 하위문화에서 어느덧 하나의 문화코드가 된 ‘덕후’ 문화를 화두로 펼쳐 보인다. 기혜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은 “다원화 시대의 덕후는 ‘학위 없는 전문가’이자 자신의 관심분야에 몰입하는 열정을 지닌 사람들로 긍정적 인식도 늘고 있다”면서 “집착이나 캐릭터 수집 등에서 진화해 관심분야를 자신의 관점으로 재생산하거나 축적한 지식을 교류하는 등 대안문화로서의 가능성이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10명의 작가들에게 ‘덕질’은 예술활동의 모티브가 됐다. 피규어를 수집하고 그 아이디어로 자신의 캐릭터 디자인을 구축하는 김성재는 “수집활동은 취미이자 창작의 시작이며 피규어는 창작을 이어가도록 자극을 주는 존재”라고 말한다. 핸드폰 액세서리를 수집해 온 박미나 작가는 주렁주렁 매달린 수십 개의 핸드폰 장식 그 자체를 작품으로 내놓았다. 초소형 소품부터 당시 유행한 캐릭터, 교통카드와 USB같은 부속물을 포함한 이 ‘시대적 유물’은 당대의 트렌드와 핸드폰이 바꿔놓은 삶의 형식 등을 보여준다. 영화 ‘스타워즈’ 덕후인 이권은 스타워즈 1~7편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모두 한 자리에 모아 아적(我敵)의 구분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를 구현했다. 낚시광인 진기종은 가짜 바늘로 실제 물고기를 잡는 ‘플라이 피싱’ 덕후의 방을 꾸몄다. 가짜의 모방을 통해 진본을 얻어내는 행위는 비단 낚시 뿐 아니라 진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관통한다.
10명의 미술인 외에 계간 독립잡지 ‘더쿠(The Kooh)’의 고성배 편집장이 별도 공간에 참여형 전시로 참여했다. 수집·혼자놀기·집착·공상·배회 등 덕후의 습성 10가지를 체험하고 자신의 덕후 가능성과 유형을 진단할 수도 있다. “내 자신이 덕후라 불리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고 편집장은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니라 성찰적 차원에서의 부족함 때문”이라며 “좋아하는 게 다를 뿐 누구나 덕후일 수 있으며, 쓸모없어 보이는 일도 열정과 지속성을 갖고 하다 보면 자본주의 경제논리 속에서 새로운 대안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7월9일까지.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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