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소년·신동)로 불리며 세계 골프계를 강타했던 세르히오 가르시아(37·스페인)도 어느덧 40대에 가까워졌다. 메이저대회 데뷔전 이후 22년이 흐르는 사이 머리숱은 눈에 띄게 줄고 날렵한 모습도 희미해졌지만 메이저대회 무관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제이슨 데이(호주)가 2015년, 더스틴 존슨(미국)과 헨리크 스텐손(스웨덴)이 나란히 지난해 메이저 첫 승을 거두면서 ‘메이저 무관의 제왕’ 목록에는 가르시아와 몇 명만이 쓸쓸하게 남게 됐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통산 9승의 가르시아는 메이저 ‘급’으로 통하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도 2008년 제패했지만 4대 메이저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22차례나 10위 안에 들었고 그중 네 번은 준우승하기도 했지만 우승은 허락되지 않았다.
‘메이저 중의 메이저’ 마스터스 최종 4라운드가 진행된 10일(한국시간)에도 가르시아를 옭아맨 저주는 풀리지 않는 듯했다. 오거스타 내셔널GC(파72)의 마지막 18번홀(파4)에서 142야드의 두 번째 샷을 홀 1.5m에 붙인 가르시아는 1m 더 멀어 보이는 거리에서 저스틴 로즈(잉글랜드)가 버디 퍼트를 놓치면서 우승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집게 그립’에서 시작된 그의 내리막 퍼트는 홀 쪽으로 휘지 않고 직선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새가슴’ 오명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2007년 브리티시 오픈(디 오픈)에서도 1타 차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 홀 보기로 연장을 허용, 파드리그 해링턴(아일랜드)에게 우승을 넘겨줬던 가르시아다.
다잡은 우승을 또 놓치고 연장에 끌려갔지만 가르시아는 이상하게 편안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동안 켜켜이 쌓인 실패가 가장 중요한 순간 강철같은 정신력으로 작용한 건지도 모른다. 18번홀에서 진행된 연장에서 로즈가 티샷을 오른쪽으로 보내는 바람에 레이업으로 볼을 빼낸 반면 가르시아는 흔들림이 없었다. 두 번째 샷을 4m 지점에 떨어뜨렸다. 로즈가 보기로 마쳐 가르시아는 2퍼트만 해도 우승인 상황. 퍼터를 떠난 볼은 홀 가장자리를 반 바퀴쯤 돌고는 사라졌다. 1996년 디 오픈에서의 메이저 데뷔전 이후 22년 만이자 74번째 출전 만의 메이저 첫 승은 그렇게 완성됐다. 우승상금은 198만달러(약 22억5,000만원).
그대로 쪼그려 앉아 감회에 젖은 가르시아는 그린을 주먹으로 살짝 누르며 전 세계에 오거스타 정복을 선언했다. 사실 가르시아가 은퇴 전 메이저를 제패한다면 그 무대가 마스터스는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이전까지 10위 안에 든 적이 단 한 번일 정도로 궁합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주 나흘간 9언더파 279타를 적는 동안 이글 1개에 버디 14개를 쏟아냈고 평균 291.5야드를 날아간 드라이버 샷은 80.4%가 페어웨이에 안착했다. 54회의 그린 적중, 홀당 퍼트 수 1.65개, 샌드 세이브 5/6(벙커에 빠져도 파 이하 기록) 등 81번째 그린재킷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경기력을 선보였다. 마지막 날에는 이글 1개에 버디 3개, 보기 2개를 적었다.
허리 통증 탓에 불참한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미국)는 경기 직후 트위터에 “가르시아, 축하해. 네가 우승하는 게 당연한 경기였어”라고 적었다. 1999년 프로에 데뷔한 가르시아는 그해 메이저 PGA 챔피언십에서 우즈와의 명승부 끝에 우승과 1타 차의 준우승을 나누면서 이후 우즈의 대항마이자 앙숙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자신의 우상인 세베 바예스테로스(스페인)의 생일에 메이저 트로피를 품은 가르시아는 엘니뇨 신드롬을 일으켰던 십수 년 전 당시만큼이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가르시아는 2011년 세상을 떠난 유럽 최초의 마스터스 우승자 바예스테로스와 호세 마리아 올라사발에 이어 마스터스를 접수한 세 번째 스페인 선수로 기록됐다.
출전자 수를 두 자릿수로 엄격하게 제한, 기량 차가 종잇장인 명인들의 명승부를 매번 연출해온 마스터스는 올해는 가르시아와 로즈의 숨 막히는 결투를 선사했다. 지난해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로즈와 공동 선두에서 4라운드를 맞은 가르시아는 15번홀(파5) 이글로 결정타를 날렸다. 189야드 거리에서 8번 아이언으로 높게 띄운 두 번째 샷이 홀 옆 4m에 멈췄고 퍼트를 넣은 가르시아는 전성기의 우즈처럼 어퍼컷을 날리며 포효했다. 1타 차 열세를 동타로 만든 이 이글 퍼트는 가르시아가 역대 마스터스에서 452홀 만에 성공한 첫 이글이었다.
가르시아는 “그동안 곡절을 겪은 드라마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고 했다. 그는 이날 진한 포옹을 나눈 미국 골프채널 리포터 출신 앤절라 애킨스와 올해 결혼할 예정이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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