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3월21일, 모스크바. 소련 공산당 10차 전인대회가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을 채택했다. 골자는 시장 경제의 부분적 허용. 식량징발제를 폐지하는 대신 현물세를 도입했다. 농민들은 세금을 내고 나머지 잉여 생산물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게 됐다. 대기업을 제외한 기업들의 국유화 조치도 풀렸다. 대기업과 중공업, 수송, 은행 부문만 국가가 직접 통제하고 나머지 분야는 시장에 맡긴 것이다.
사회주의 소련은 왜 자본주의적 정책을 도입했을까. 경제난과 인민들의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직전 러시아 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5위, 국민소득은 10위권이었으나 전쟁과 공산 혁명은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레닌을 비롯한 혁명가들은 볼셰비키 독재 체제를 이뤘어도 경제 운용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철학이나 비전이 없었다. 볼셰비키 최초의 경제정책은 일종의 과도 경제. 경제 시스템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로 ‘최초의 8개월’로 불린다.
‘최초의 8개월’ 이후부터는 ‘전시공산주의’가 러시아 민중의 삶을 짓눌렀다. 가혹한 식량 징발과 농민의 불만을 야기한 전시 공산주의의 배경은 두 가지. 내전과 외국의 침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의 붉은 군대(적군)와 구 왕조를 지지하는 백군 간 내전이 시작되고 미국과 영국, 일본 등은 백군을 지지하며 무르만스크와 시베리아에 군대를 보냈다. 우크라이나와 시베리아, 볼가강 일대 곡창지대, 돈바스 탄전과 바쿠 유전, 투르크메니 목화 산지를 백군과 외국군에 점령 당한 볼셰비키 정권은 오로지 적군의 생존을 위해 농촌을 짜냈다.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고, 매입하는 경우라도 마구 발행된 불태환지폐를 지급하는 통에 물가가 크게 올랐다. 니콜라이 슈멜레프와 블라디미르 포포프가 공저한 ‘소련 경제의 대변혁’에 따르면 혁명 발생 시점인 1917년 전전(1913년) 대비 2.94배였던 물가는 이듬해 20.76배, 1919년에는 164배, 1920년 2,420배, 1921년에는 1만6,800배로 치솟았다. 인구의 70~80%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도시와 군대를 위해 일방적 희생을 강요 당한다는 불만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전시 공산주의로 내전에서 승리하고 외국 군대도 몰아냈으나 농민들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결정적으로 1921년 2월 말 레닌그라드 외곽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에서는 수병들까지 참가하는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열렸다. 혁명의 자랑이며 영광이라던 이 요새에서 시민과 노동자·병사 1만8,000여명이 외친 구호는 ‘소비에트 예스, 볼셰비키 노!’ 사회주의 혁명은 좋지만 볼셰비키 일당 독재는 물러가라는 의미였다. 저항은 적군의 무자비한 학살로 끝났다. 양쪽 사망자만 1,530여명. 부상자는 9,820여명에 이르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고 6,000~8,000여명은 이웃 핀란드로 도망쳤다.
‘전시공산주의’의 폐해를 고민하던 레닌은 코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직후 단안을 내렸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실제로는 혼합 경제였던 ‘최초의 8개월’ 체제로의 복귀였다. 내키지 않는 ‘긴급 처방’이었던 신경제정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신경제정책을 시행할 당시 상황이 워낙 나빴다. 김광수 숭실대 교수의 ‘소련경제사’에 따르면 1913년 소련의 무역과 생산지수를 100으로 삼았을 때 1920년 공업지수는 20, 농업 64, 수송 22에 불과했다. 외국 무역은 수출이 0.1, 수입이 2.1까지 떨어졌다. 사적 부문의 부분적 부활이 허용된 지 1년 만에 소비자와 생산자 간 시장이 열리고 기업인들도 이윤 동기를 찾아 활발하게 움직였다.
김 교수의 ‘소련경제사’는 신경제정책을 이렇게 평가한다. ‘전시공산주의가 내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전쟁으로부터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신경제정책은 전략적 성공을 거뒀다.’ 수치가 말해준다. 1926년에는 공업과 농업 부문의 생산력이 1차 대전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 1925년 모스크바 열성당원 회의에는 ‘부자 되세요’라는 당국의 구호까지 내걸렸다. 1928년 국민소득은 전전(1913년)보다 19%, 공업생산은 39%, 농업 소출은 11%, 전력 생산은 103%나 늘어났다. 금본위제에 입각한 정화(正貨) 발행으로 물가가 안정되고 대외무역의 신뢰도 역시 높아졌다. 소련 경제학자로는 거의 유일하게 주류경제학에 이름을 올린 니콜라이 콘드라티에프(Nikolai Kondratiev)가 ‘평균 50~60년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된다’는 ‘장기파동론’을 주창한 것도 이 무렵이다.
개인들의 삶도 나아졌다. 부농(쿨락·kulak)과 신경제정책으로 재산을 모은 신자본가(네프맨·nepman)가 생겨났다. 신경제정책을 이끌었던 우파 니콜라이 부하린은 레닌 사망 이후 권력승계 투쟁에서 중도파인 스탈린과 손잡고 좌파인 트로츠키를 내쫓는 등 승승장구의 길을 달렸다. 상황은 1928년부터 정반대로 바뀌었다. 정적 사냥을 끝낸 스탈린은 부하린도 숙청 대상에 포함시켰다. 1938년 총살형 집행. 자영농과 부농, 기업인들은 토지를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에 빼앗겼다. 농민들은 중화학공업 우선 정책에 반발했지만 돌아온 것은 피의 숙청. 1,000만명 가까운 농민이 목숨과 집과 농토를 잃었다.
불가사의한 사실은 신경제정책을 전면 폐기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한 소련이 대공황에 허우적거리던 서방국가들과 달리 1950년대까지 초고속 성장했다는 점. 최초의 계획경제인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이후 소련 경제는 연간 성장률이 14~20%에 달하는 고성장 가도를 달렸다. 1937년 공업생산은 10년 전의 네 배에 이르렀다. 국제연맹 자료에 따르면 경제 기적을 이뤘다는 일본이 1928년부터 10년간 84% 성장한 데 비해 소련은 같은 기간 중 497%나 성장했다. 경제학자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이런 평가를 내렸다. ‘소련의 통계가 과장됐다는 점을 감안해도 산업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통하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배경에도 고성장으로 배양된 경제력이 깔려 있다. 문제는 불균형 발전. 국방 분야 등 중공업 일부만 발달하는 구조 속에서 경공업과 농업 부문의 낙후에 발목이 잡힌 소련은 결국 1990년 해체되는 운명을 맞았다. 소련의 몰락은 신경제정책이 짓밟힐 때부터 예고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신경제정책의 핵심은 요즘도 여전히 유용하다. 사회 구성원의 의욕과 창의력이 수반되지 않는 경제, 계획에 의해 통제되고 강요된 경제는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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