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독일 나치스의 아돌프 아이히만을 두고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고 묘사했다. 아렌트가 재판정에서 목격한 아이히만은 성실하고, 직업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그는 ‘성실함’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악’을 깨닫지 못했다. 아렌트가 주창한 ‘악의 평범성’이다.
여기 두 남자가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건도 마다하지 않는 이 변호사, 그리고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 검사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연극 ‘베헤모스’ 속 두 인물은 한 재벌 2세가 휘말린 살인사건을 통해 맞닥뜨린다. 두 사람은 목적과 목표가 다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선 너무도 닮았다.
극이 전개될수록 관객들이 목격하는 것은 욕망하는 인간 속에 피어나는 악의 실체다. 악은 욕망에 기생한다. 욕망이 너무 커져 버린 나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순간, 악은 숙주인 욕망을 조종한다. 의식하지 못한 채 한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순간이다.
괴물이 늘어나 집단을 이루면 사회의 상식을 뒤집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괴물 베헤모스가 이 연극의 제목으로 꼭 들어맞는 것도 이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짐승들을 의미하는데, 한 마리지만 복수의 동물을 한데 모은 것 같이 너무나 거대해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칼로 찔러도 죽지 않고 넘어뜨릴 수도 없었다는 베헤모스. 그것은 악에 잠식된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연극 ‘베헤모스’는 흥미롭지만 새롭지는 않다. 정의 구현에 집착하는 오 검사는 영화 ‘내부자들’의 우장훈 검사(조승우)나 ‘베테랑’의 형사 서도철(황정민) 같다. 돈에 눈이 먼 이 변호사는 영화 ‘더 킹’의 박태수 검사(조인성), ‘부당거래’의 주양 검사(류승범)를 닮았다. 하지만 비슷한 스토리와 인물이 계속해서 소비되는 이유는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얼개 위에 살을 더한 허구가 현실과 꼭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 복무하는 이들이 득세하는 한 이 같은 스토리는 물리도록 나올 테니 말이다.
그래도 이 연극은 플롯, 배우들의 연기, 스토리 등 어느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다. 또 하나 이 작품에서 높은 점수를 줄만 한 것은 효율적인 무대 사용이다. 원작 드라마(KBS 단막극 ‘괴물’, 2014)를 무대로 옮긴 수준을 뛰어넘어 영상과 독특한 무대 구성, 각종 상징물을 통해 드라마에선 구현할 수 없었던 연극의 강점을 극대화 했다. 특히 사건 현장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영상은 공간적 제약을 극복한데서 나아가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다음 달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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