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철학’이 있을까. 그렇다. 있다. ‘돈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이라는 제목을 가진 독일어 책이 1900년 나왔다. 저자는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1858년3월1일 베를린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부친과 루터파 신교도로 개종한 어머니 사이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60 평생을 ‘아웃 사이더’로 보낸 사회학자다. 초콜릿 공장을 운영한 부모 밑에서 유복하게 태어나고 성장과 학업을 모두 베를린에서 마쳤으나 베를린 학계는 물론 독일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불우한 학자로 여겨졌을 뿐이다.
철학과 문학·공연예술·심리학·인류학사생활에 이르기까지 특출한 저작을 잇따라 내놓고 학생들도 활력 넘치는 강의에 열광했지만 교수직 임용에 내내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나이 40줄을 넘긴 1901년 모교인 베를린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겨우 얻었다. 54세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와 접경한 스트라스부르크(지금은 프랑스령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정교수로 임용됐지만 1차대전으로 강의도 제대로 못해보고 1918년 간암으로 죽었다. 라이벌 격인 막스 베버와 달리 늦도록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 독일의 유대인 혐오 기운이 높아지고 있던 시대인데다 주류 사회학과 다른 이론을 펼쳤기 때문이다.
여느 독일 철학자들과 달리 그는 전체적이고 거시적인 사안 대신 일상적이고 단편적인 주제를 다각도로 다뤘다. 체계와 이론의 틀을 중시하는 독일학계에서는 이단아였던 셈이다. 평생을 강사로 떠돌면서도 그는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200여편의 논문과 기고, 23권의 저술 중 대표작은 ‘돈의 철학’(1900년). 머리말에 ‘이 책의 단 한 줄도 경제학적 연구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적었지만 실제로는 시장경제가 촉진시킨 개인의 발전을 다뤘다. 1부에서는 일반적인 삶의 조건과 관계로부터 돈의 본질을 연구했고 2부에서는 일상생활에 미치는 돈의 역할을 찾았다. 시장경제가 촉진한 개인의 발전을 연구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돈의 속성을 철학적으로 규명한 지멜은 돈이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축복과 재앙을 동시에 가져다줄 수 있다고 봤다. 지멜에 따르면 돈은 인간들이 더 큰 자유를 실현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상호관계를 새롭고 다차원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만든다. 개인은 물론 사회도 돈으로 인해 발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동시에 지멜은 돈에 대한 경계도 강조했다. 돈은 개인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소외시킬 수도 있다고 봤다. 인격을 지키기 위한 수단을 넘어 목적이 된다면 영혼이 훼손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멜의 유명한 명제가 나왔다. ‘돈은 영혼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지멜은 이 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를 구매에 대한 선택으로 봤다. 의식주는 물론 여흥까지 시장에 의존하는 시대의 삶은 구매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냉정해지는 것도 어떤 물건을 사는가에 대한 고민의 귀결로 여겼다. 지멜은 ‘돈의 철학’은 없고 ‘돈을 위한 철학’, 즉 인간의 사유가 돈에 종속되는 현상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삶에 대한 성찰’은 없고 ‘부(富)에 대한 관심’만 남은 사회에 대한 우려는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
독일에서도 생전은 물론 1970년대까지 잊혀진 존재였던 지멜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일에서는 이미 전집 출간이 완료되고 연구서가 쏟아지는 등 시간이 갈수록 각광받고 있다. 요즘은 베버와 비슷한 자리까지 올라섰다. ‘지멜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국내에서도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불과 한 세대 전까지 대표작인 ‘돈의 철학’ 번역조차 영문판(The Philosophy of Money) 중역(重譯)에 그쳤으나 전집 출간까지 진행되고 있다.
지멜은 50년 먼저 태어난 마르크스와도 구분된다. 마르크스는 평등과 정의를 달성하기 위해 가진 자들이 독점한 생산수단과 그 잉여를 빼앗아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부르짖었다. 반면 지멜은 돈을 노동과 투쟁의 시각으로 보기 보다는 돈의 문화적 속성과 삶의 양식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졌다. 지멜 전집 번역 출간을 진행 중인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는 마르크스와 차별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지멜은 자본주의적 세력과 질서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 특유의 경제적·사회적 강제와 요구로부터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인격을 발전시키며 궁극적으로 본질적 자아에 복귀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지멜은 저서 ‘돈의 철학’이 경제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지만 화폐 제도의 발달을 꿰뚫어 봤다. 화폐가 물물교환-금속화폐-지폐로 발전하는 과정을 ‘돈의 추상화’라고 해석했던 그의 생각은 마치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플라스틱 머니(신용카드)와 전자화폐로 돈의 추상화가 가속되는 시대, 궁금해진다. 인간은 과연 ‘돈을 위한 철학’을 ‘삶과 인간을 위한 철학’으로 돌리고 돈을 통해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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