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7년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추웠다. 그해 11월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극비리에 한국을 찾았고 12월 초 한국 정부와 IMF 간의 공식적인 구제금융 합의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국가부도 사태를 맞은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IMF가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에 놀란 시민들은 집안으로 숨어버렸고 서울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에는 다니는 차량이 없어 일일이 숫자를 헤아려야만 했다. 모두가 불안한 마음에 한 푼이라도 덜 쓴다며 외출마저 꺼린 탓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한마음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며 장롱 속 깊숙이 감춰뒀던 돌 반지와 결혼 패물을 내놓아 위기 극복에 힘을 보탰다. 대한민국이 세계가 놀랄 만큼 IMF 위기를 조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런 공동체 의식과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올해 겨울도 춥기는 마찬가지다. 연말 경기는 꽁꽁 얼어붙었고 장사가 안된다는 하소연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AI) 파동에 계란과 라면까지 줄줄이 오르다 보니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더욱 어렵다. 많은 이들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엊그제 나온 통계에서는 올 3·4분기에 여덟 가구 중 한 가구꼴로 매달 100만원도 채 못 쓰고 있다고 했다. 중산층 살림을 들여다봐도 전국 가정의 절반이 한 달 200만원 미만의 돈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간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지금이 IMF 위기 당시보다 어렵다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한 대목이다. 쌀과 식료품 같은 기본 생필품 소비마저 수년째 줄어들고 있다니 한마디로 먹고 입는 것마저 줄이는 소비절벽이 눈앞에 닥쳐온 것이다.
국민들 사이에 불황 심리가 퍼지는 것은 소득이 갈수록 쪼그라드는 반면 수입은 언제 늘어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탓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국내외 불투명한 정치상황이 소비심리를 극도로 위축시켜 지갑을 꽁꽁 닫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탄핵정국이 길어지면서 나라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걸렸다는 분석마저 나오고 있다. 오죽하면 올겨울에는 유난히 어둡고 칙칙한 옷차림이 유행한다는 얘기가 들려오겠는가. 아마도 암울하고 답답한 사람들의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일 것이다. 미래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가뜩이나 위축된 수요를 얼어붙게 만든다면 더 큰 경기 침체를 불러올 것이라는 비관론이 팽배해지고 있다. 우리 마음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과도한 디플레이션 우려가 경제 전반에 악순환을 몰고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의 AI 대처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지금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탄핵정국으로 정부 불신이 팽배해진 탓에 영이 제대로 안 서고 중심이 흔들리는 상황이다. 정부가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미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바람에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당장 국민연금만 해도 이리저리 휘둘리는 마당에 누군들 노후대책을 걱정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야권에서는 기존의 경제정책 전반을 뒤집어 엎겠다고 나서니 국민들로서는 헷갈리게 마련이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경제활동을 영위해야 할지 묻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기업들도 투자를 꺼리는 이유로 단연 정치·사회적 불안을 꼽고 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는 그 어떤 번듯한 정책을 내놓더라도 기대만큼의 효과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국민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정책적 배려가 절실하다. 아무리 작은 투자라도 미래가치를 보면서 투자하는 전략이 훨씬 효율적이다. 정치권도 민생을 세심하게 챙겨 진정한 수권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흔히 경제는 심리라고 한다. 국민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는 치유의 정치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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