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격 소리와 함께 온몸에 진동이 느껴진다. 천장에선 모래가 떨어지고, 바삐 오가는 군인(배우)들의 거친 숨소리에 관객도 함께 긴장한다. 전쟁터의 참호를 표현한 19평 남짓한 공간은 100여 개의 객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맨 앞 열 관객과 배우의 사이는 무릎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그렇게 관객을 전쟁의 참상 한가운데로 초대한다. 공간이 주는 색다른 경험과 각기 다른 세 개의 에피소드를 모두 봐야 작품 하나가 완성되는 3부작 형식까지. 이 독특한 방식의 공연은 영국 출신의 젊은 연출가 제스로 컴튼(28·사진)의 트레이드 마크다.
“제 앞에 놓였던 제약 덕에 새로운 형식을 창조할 수 있었죠.” 벙커 트릴로지의 한국 초연을 위해 내한한 컴튼은 서울 대학로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제스로 컴튼 표 트릴로지(3부작)’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어렸고, 돈도 없어서 극장 아닌 정말 좁은 공간에서 공연해야 했어요. 한 공간에서 연극 한편 올리는 값으로 세 편을 올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제 트릴로지 시리즈가 시작된 거죠.” 2013-2014년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벙커 트릴로지는 아서왕 전설을 재해석한 에피소드 ‘모르가나’와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비극 ‘아가멤논’을 모티브로 한 ‘아가멤논’, 셰익스피어의 동명 비극을 재해석한 에피소드 ‘맥베스’ 세 편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군과 독일군 벙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후 선보인 카포네 트릴로지(2015년 한국 초연)와 프런티어 트릴로지는 각각 미국 시카고 렉싱턴 호텔의 661호, 서부개척 시대 미국 캘리포니아의 성당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시기 발생한 세 개의 에피소드를 엮어 만들었다. ‘컴튼은 “인간 심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인간의 공통된 삶과 캐릭터를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컴튼 표 트릴로지의 핵심은 ‘같은 듯 다르게, 다른 듯 같게’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성을 갖추면서도 관객에게 세 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1과 이야기 2가 너무 유사하면 관객 입장에선 ‘다른 것을 봤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고, 그렇다고 너무 달라도 트릴로지의 형식이 깨져요.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한국 배우들의 공연을 관람한 컴튼은 원작자로서 높은 만족도 드러냈다. 그는 “배우들이 연기를 정말 잘 해줬다”며 “특히 이석준 배우는 대사를 하지 않거나 무대 중앙에 있지 않을 때조차도 눈으로 좇게 될 만큼 존재감이 대단했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에서 내 작품이 공연되고, 이렇게 큰 사랑을 받고 있어 정말 행복하다”며 “내년 한국에서 공연 예정인 ‘프런티어 트릴로지’(서부 개척시대의 한 성당을 배경으로 한 3부작)도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내년 2월 19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아이엠컬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