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든 창덕궁에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10대들이 몰려다녔다. 한복을 입고 궁궐을 찾아 사진을 찍는 것이 그 또래의 유행인 듯했다. 재잘거리던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인사동과 북촌에 한복을 빌려주는 집이 있다”고 했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화장까지 하고 한껏 멋을 부렸다. 가을 단풍 위에 나비같이 내려앉은 아이들은 경복궁 후원의 시름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주말도 아닌 평일에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이들은 모여들었는지 평화로운 그들의 발길은 창덕궁 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7년의 전란 동안 창덕궁·창경궁·경복궁이 불탔다. 창덕궁의 복원은 전쟁이 끝나고 1607년 시작돼 1610년(광해군 2년) 끝났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모습을 갖춘 궁에 들어가면 처음 객들을 맞는 건물은 인정전이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왕의 즉위나 사신 접견 등을 하던 곳이었다. 인정전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보면 천정을 장식한 커튼과 전등 같은 서양식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오는데 이들은 1908년 내부를 고치면서 장식한 것들이다.
창덕궁이 다른 궁들과 다른 점은 지형 때문이다. 경복궁·덕수궁 등이 정방형의 대칭구조인 데 비해 창덕궁은 산세를 따라 들쑥날쑥 지어진 비대칭 구조다. 산이 들어간 곳에는 연못 파고 정자 짓고 산이 튀어나온 곳을 피해 궁궐을 지었다.
지형과 산세에 의지한 모습은 그저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된 자태로 자연미는 궁을 끼고 돌아 들어간 후원에서 절정에 이른다. 네모난 연못 위에 떠 있는 부용정은 단풍을 뒤집어쓴 채 수면 위로 제 모습을 비쳐 보고 있고 못 주위에 모여든 관람객들은 사진을 찍거나 가을을 완상하고 있다.
정방형의 부용지는 고대 중국의 수학 및 천문학서인 ‘주비산경’에 나오는 ‘둥근 것은 하늘에 속하니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에 따른 것이다. 부용정은 한 떨기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조선조 때 왕과 신하들이 시를 읊으면 놀던 곳인데 지금은 민주공화국의 문화재가 돼 백성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은 이름도 여러 개다. 뒤에 있다고 해서 후원(後苑)이라 불렸고 일반 백성들은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출입을 금지해 금원(禁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위치로 따지면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은 북원(北苑)이고 안쪽에 있다고 해서 내원(內苑)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불리던 비원(秘苑)이라는 이름은 1903년 얻은 것이다. 비원의 의미는 ‘비밀스런 정원’이라는 뜻이었는데 이름도 무색하게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때부터 개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오래된 이름은 창덕궁 후원이다. 후원 깊숙한 존덕정 일원에는 4개의 정자와 2개의 연못이 있다. 이곳의 정자들 중 존덕정은 인조 때 지어진 것으로 육각형의 겹지붕을 하고 있는 반면 바로 옆의 폄우사는 맞배지붕에 홑처마를 댄 양식이다. 여기서 ‘폄우’란 ‘어리석음을 고친다’는 뜻으로 탐욕에 휘둘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작금의 세태를 경계하고 있다. 폄우사는 조선 후기 제작된 ‘동궐도’에서는 ‘ㄱ’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一’자 모양으로 바뀌어 있다.
청의정 앞에는 서너평 남짓한 논이 눈길을 끌고 있다. 지금은 추수가 끝나 낫으로 베인 자리 위로 웃자란 벼의 싹이 올라와 있고 한편으로 구석에 쌓인 짚단들은 이미 잿빛으로 색이 바랬다. 해설사는 “청의정에 논을 만든 이유는 왕실에서도 벼농사를 중히 여겼다는 방증”이라며 “조선시대 벼농사는 중요한 산업이었던 만큼 조선의 왕들은 성 밖으로 나가 직접 농사 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례(親耕禮)를 되풀이했었다”고 설명했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풍속이 1909년 이후 중단됨에 따라 창덕궁 안에 논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친경례를 대신하게 됐다. 맵싸한 늦가을 날씨에 갈라진 논바닥은 친경례의 애민정신이 새어나간 균열인 듯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글·사진=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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