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에서 봤을 때 ‘최순실·차은택 게이트’ 논란 과정에서 잊힌 것이 있다. 바로 문화계 ‘블랙리스트’다. 정부가 ‘반정부적’인 문화계 인사들의 리스트를 관리하면서 이들에게 불이익을 줬다는 주장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펄쩍 뛰고 있지만 정황상 근거가 있다. 어떻게 보면 ‘문화계 황태자’라고 불린 차은택은 ‘별것’ 아니다. 이들이 병의 표피적 증상이라면 원인에 가까운 것은 블랙리스트다.
문화부는 역대 정권마다 이른바 코드 인사나 논공행상 인사로 파행을 겪은 단골 부처다. 정권을 장악한 측은 코드가 맞는 인사나 선거 공신을 문화부 장관이나 산하 기관장에 배치했다. 이는 당연히 문화계 현장과 충돌을 빚었다. 그리고 매 정권 교체 시 ‘피의 인사 보복’을 부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단순히 국정 홍보와 이념 확산에 그친 문화부의 장점을 깨달은 정권은 여야 정권 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다. 수십 년간 지속된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진보 쪽으로 바꾸는 데 문화부를 활용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최측근인 박지원씨를 장관으로 발탁했고 문화부의 역할과 권한을 늘렸다. 50여개 소속·산하 기관과 파생된 조직·기금은 이를 위한 전위대이자 지지세력 확보 수단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노무현 정부 때까지 지속된다.
다시 정권 교체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화부 장관을 비롯한 산하기관 인사들이 보수 인사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의 첫 장관인 유인촌씨는 ‘코드 인사’ ‘숙청’ 등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대대적인 산하 기관장 교체에 나섰다. 물론 목적은 10년 진보 정권과의 차별화였다. 박근혜 정권은 보수정권으로 전 정권과의 이념적 차이가 없었음에도 상당한 물갈이가 있었다.
이제는 문화부가 논공행상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문화부를 장악하고 문화계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면 반대파의 진입을 막아야 한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블랙리스트’나 ‘살생부’로 불리는 것이 탄생한 이유다. 다른 생각과 다른 의견에 대한 자원 지원은 끊겼다.
보수든 진보든 이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특히 중앙 권력이 통제권을 잃은 상태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노골적인 ‘사익’ 추구밖에 없다. 차은택 같은 부류의 인사들이 발호할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이들은 장관·차관과 기관장 자리를 마치 거래물품쯤으로 여겼다. ‘누구에게 장관 주겠다’ ‘네가 기관장 해라’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타락했다.
최순실·차은택 게이트의 전모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문화부는 이 게이트에 관련 있는 것은 과감히 정리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증상에 분을 바르는 것뿐이다. 근본 원인은 그대로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문화부가 어떤 특정한 정파나 집단의 소유가 아닌 자율성과 창의성이 발휘되는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 또한 박근혜 정권의 공신이었던 조윤선 장관 시대에 가능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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