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은 포스터에서부터 ‘바보같은 꿈’을 이야기한다. 바보같은 사람이 나와 바보같은 이야기를 하고, 바보같은 행동을 하다 바보같이 끝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낯설지도, 이질적이지도 않다. 나도 당장 저들이 있는 고향주막으로 달려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다 ‘나도 예리가 좋아’를 외치며 집에 오고 싶다. 모든 것이되 아무것도 아닌 안식처, 그것이 고향주막에서 벌어진 꿈같은 이야기 ‘춘몽’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농담 따먹기나 하고 다니는 백수건달 익준, 어리버리함에 틱장애와 간질까지 가진 고향주막 건물주 종빈, 밀린 월급도 못 받고 공장에서 쫓겨난 전(前) 여자친구만 예쁜 정범과 병든 아버지를 수발하며 주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리의 일상을 묵묵히 담아낸다.
‘똥파리’의 양익준,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윤종빈, ‘무산일기’의 박정범 세 감독이 자신의 대표작에서 보여준 바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부터 쏠쏠한 재미다. 무언가 하나씩 부족한 이들이 때로는 여신이자 때로는 엄마같은 예리를 바라보는 눈빛, 몸짓, 그리고 말은 소소한 재미와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풍기는 애틋한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이들이 활동하는 배경은 수색, 서울 도심에서 가장 고립된 공간 중 하나다. 재개발지역이 그렇듯 가장 가난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최신식으로 지어진 방송국을 저만치에 두고 과자에 소주한잔 나눠마시며 이들은 늘 조금 있으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도 안날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할 것 없는 한량이기만 할 것 같은 등장인물의 일상에도 희로애락은 있다. 익준은 해파리 형님의 제안, 정범은 밀린 임금, 예리는 아픈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 종빈은 매사 문제다. 이들의 문제는 서로가 알아서 해결해준다. ‘내가 도와줄게’가 아니라 스리슬쩍 흘러가다보면 어느새 누가 누구랄 것 없이 다함께 사건 해결에 달려든다.
이처럼 현재인데 과거에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흑백으로 처리된다. 반대편 휘황찬란한 DMC와 터널 하나로 연결된 수색을 극과 극으로 나눈다. 일에 치여, 사람에 치여 거짓 표정을 짓고 사는 이들에게 ‘여기서는 안면근육 좀 풀고 웃어도 찡그려도 괜찮다’는 듯 편안하게 다가온다. 굳이 컬러일 필요가 없는, 아니 흑백이든 컬러든 상관없는 독특한 그림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을 따라다니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영화 내내 이들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덕분에 관객은 그림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다. 큰 테이블을 놓고 왼쪽에는 예리가, 오른쪽엔 아저씨들이 앉아 이야기하는걸 듣고 있자면 ‘내 잔 비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걸 억지로 억누르게 된다.
영화 내내 산울림의 노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흐른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거에요’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다. 몇 번을 되풀이해 듣다보면 네 남녀가 한명인 듯, 또 네 명인 듯 분간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흐름이 딱 끊긴다. 마치 어안이 벙벙해 출근길이 더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그런 꿈에서 깨어난 듯 다시 잠들고 싶어진다.
종빈은 정범의 밀린 임금을 두고 예리와 약속했던 대로 그녀의 가슴을 만졌을까. 익준은 예리와 키스한 기분이 어땠을까. 정범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예쁜 전(前) 여자친구를 사귄걸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고향주막에 가보고 싶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같이 술 마시다 나만 홀로 빠져나온 느낌이다. ‘이런 매정한 사람들 같으니’라며 한숨 쉬다 정신차려보니 눈앞에 아까 차려놓은 술상이 발에 채인다. 이 요상한 꿈에서 깨기 전에 술이나 한잔 더 해야겠다. 캬, 나도 “예리가 좋아”
/최상진기자 sestar@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