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자식에게만은 비단길을 깔아주고 싶은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내 자식 대신 누군가가 희생해야한다면, 내 자식이 뺏은 기회에 누군가가 피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자식사랑이 아닌 탐욕이겠죠. 특히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갖은 높은분들이 그런다면 사회가 정해놓은 규칙대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은 정말 맥빠집니다. 그래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가장 크게 보여야하는 것도 자식문제일겁니다. 때로는 그 길이 너무나 가혹하다해도말입니다. <대장 부리바>(1962년작, J 리 톰슨 감독)도 여느 아버지처럼 끔찍하게 자식을 사랑했지만 더 큰 정의를 위해 아픈 결단을 내립니다.
용맹한 코사크 족의 대장 부리바(율 브린너)에게는 천금보다 소중한 아들 둘이 있습니다. 특히 맏아들 안드레이(토니 커티스)는 자신의 대를 이어 코사크 족을 이끌 리더이기 때문에 애정이 각별합니다. 당시의 코사크 족은 폴란드의 배신으로 자신들의 대초원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부리바는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적을 알고, 학문을 배우라고 두 아들을 폴란드에 유학시킵니다. 그러나 비극의 씨앗은 행복속에 숨겨져있나봅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폴란드 귀족의 딸 나탈리아(크리스티나 카우프만)를 보고 한 눈에 반하는 안드레이. 세상을 설레게한 수많은 여배우를 봤지만, 아직도 저는 이 여배우를 처음 봤던 <폼페이 최후의 날>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선량한 인상속에 담긴 청순함과 우아함, 귀여움...같은 여자가 봐도 이렇게 감동인데 남자들 속에서 거칠게 자란 안드레이야 더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상남자 안드레이의 저돌적 구애에 나탈리아도 마음을 열고 열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질투에 불탄 알렉스대위를 죽인 안드레이는 어쩔수없이 집으로 돌아오게됩니다. 그리고 결국, 코사크족과 폴란드는 전쟁을 치르게됩니다. 대장 부리바가 이끄는 코사크족은 폴란드군을 제압하고 드브르성을 포위합니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나탈리아가 걱정되어 몰래 성 안으로 들어가고 재회의 기쁨도 잠시, 바로 붙잡히게됩니다.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하게 된 나탈리아를 살리기위해 안드레이는 성밖의 소때를 끌고 올 것을 약속합니다. 폴란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어설픈 배신은 아버지이자, 민족의 지도자인 부리바에게 딱 걸리게 됩니다. 대장 부리바는 기가 막힙니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이 중차대한 시점에 아들이 배신을 하다니! 아버지는 왜 그랬느냐고 묻지만, 안드레이의 답은 신통치않습니다. 그저 그래야했을 뿐이라는….“너에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 생명을 거두는 것도 내가 하겠다” 대장 부리바는 배신자 안드레이를 향해 총을 쏩니다.
안드레이도 얼마나 고민하며 그 자리에 섰을까요.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코사크족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안드레이의 배신도 간단한 선택은 아니었을겁니다. 부리바 역시, 자식을 죽여야하는 심정이 참담했을겁니다. 그러나 두 남자 모두 이 작은 타협이나 사사로운 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과 민족의 미래를 결정하는가를 알기에 이 모든 결과를 받아들였을겁니다. ‘지도자’의 길은 이렇게 엄중한것이죠. 국가의 운명앞에서는 천륜마저도 뛰어넘을수있어야 리더겠지만, 그렇게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엄청난 일이 아닌데도 내 자식만 생각하는 힘있는 분들을 보며 마음이 좀 울적해집니다.
KBS1라디오 <함께하는 저녁길, 정은아입니다>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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