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가고 안 가고는 정치적 부분입니다.”
히말라야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인도의 작은 산골마을 다람살라에서 서울경제신문이 만난 달라이 라마(81)는 한국 방문에 대한 강한 열의를 드러냈다. 한국에 방문하면 “맛있는 김치를 먹고 싶다”는 말도 했다. 중국의 정치적 반대 탓에 방한 길이 막혀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치적·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다람살라에서 대화를 나눴다.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의 경제적 보복 우려가 커지고 있는 요즘이라 더욱 의미 있는 만남이었다. 중국의 의사에 반해 달라이 라마를 만난 나라들은 하나같이 중국의 경제적 보복을 면하지 못해 ‘달라이라마 효과’라는 경제용어까지 생겼을 정도니 말이다.
이날 오전 라마궁 접견실에서 한국의 기자단·불교계인사들과 1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이례적인 친견을 달라이 라마는 가벼운 농으로 시작했다.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하나. 아시아 불교 국가 중에서 일본을 빼고는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비구(남자 스님을 일컫는 불교 용어)라서 그런가.” 인천공항에서 뉴델리를 거쳐 다람살라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 길을 마다하고 달려와서 경건한 친견 자리를 앞에 두고 잔뜩 긴장했을 기자 일행의 경직된 마음을 특유의 농담으로 풀어준 것이다. ‘살아 있는 부처’라 불리는 달라이 라마답게 품이 넓은 배려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친견단에 모습을 드러낸 달라이 라마는 자주색 빛을 띤 티베트 승복 차림에 표정이 밝았다. 접견실은 불화 11점과 불상을 담은 불함 등 불교 관련 장식품과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의자와 테이블만 소박하게 놓여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망명정부라지만 달라이 라마의 높은 명성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늘 나오는 것이 티베트풍으로 거처를 재건축할 의향에 대한 질문인데 그때마다 달라이 라마는 “그저 비만 피하면 된다”고 답하며 손사래를 친다는 것이다. 항공기를 탈 때도 달라이 라마는 등받이를 뒤로 젖히는 법이 없다고 한다. “스님의 삶은 모범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달라이 라마 스스로 견지하는 삶의 자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달라이 라마는 친견 자리에서 방한, 아시아 평화, 평소 관심이 큰 젊은이들의 겪고 있는 어려움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드러냈다.
특히 한마음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아시아인들의 바람과 달리 사드 문제, 남북문제 등으로 아시아의 잠재불안이 오히려 커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달라이 라마는 자비와 연민을 어린 세대들에게 교육하는 것을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0년, 20년, 30년을 가지고 사회가 바뀌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에게 사랑·자비·연민을 알려주고 교육하면 그들은 사회에 진출에 새로운 세기를 열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40년 후에는 좀 더 나은 세상이 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종교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 합리적 종교인으로 평가받는 달라이 라마는 종파와 상관없이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올바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 등의 종교에서 창조주가 이 세상을 만든 이유를 살펴보면 사랑과 연민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종교에서는 창조주는 없지만 인과와 업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창조주가 있는 종교를 믿는 이들은 창조주의 뜻대로 사랑과 연민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은 종교를 가진 이들 역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방한 문제에 대해서는 수차례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큰 관심을 보였다. 다만 방한이 어려운 이유를 직접 거론하며 현실의 벽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방한은) 중국 정부가 변화하기 전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공산당 체제지만 북한을 압박하는 등 내부 변화가 좀 있는 것 같다. 중국 쪽 지인 말로는 내년에 19번째 공산당 회의가 있는데, 이 회의가 끝난 이후에는 좋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달라이 라마는 방한하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방추위에서 정해준 일정대로 할 것”이라며 “다만 맛있는 김치는 먹어보고 싶다”고 말하며 웃었다.
방한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남걀사원을 찾은 한국 불자들을 위해 신심(信心)을 담아 법회를 매년 열고 있다. 지난달 29일 열린 법회에는 세계 각지에서 3,000명이 넘는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법회의 중심은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을 위한 법회는 올해로 14회를 맞았다. 법회를 찾은 300여명이 넘는 한국인 불자들은 달라이 라마가 용수보살이 인도의 한 왕에게 설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보만론’을 통해 율법이 무엇이고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법문을 2층 법당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를 직접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지리적 어려움 등으로 그의 설법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한국 불자라면 21세기에는 더불어 사는 불자가 돼야 한다. 한국 방문을 못했으나 내가 하는 법문에 관심을 가져주는 게 한국 불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며 “나 자신을 부처와 비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만 부처의 말은 2,600년이 지난 지금도 현존한다. 제가 말하는 법을 전하고 글로 옮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달라이 라마는 출가자 수가 점점 줄어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불교의 발전 방향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독송과 예불만 하고 배움과 수행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한국 불자도 배우고 공부에 힘써야 불교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고 부탁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티베트에서 넘어오는 청년들 교육에 큰 관심을 보이는 달라이 라마는 취업난·경제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청년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물질적 행복은 우리의 오감에 달렸고 마음의 행복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며 “마음의 행복과 불행은 육체의 행복과 불행에 비해 크고 중요하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이 행복하면 (물질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극복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다람살라=박성규기자 exculpate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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