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쫓겨나 경기도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중원·수정구 일대) 천막으로 강제 이주된 소년. 홀어머니와 세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17세에 은행원이 된 청년. 야간대학에 진학하고 행정고시 재경직 합격증까지 손에 거머쥔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신화. 김동연 아주대 총장의 이력이다.
나라 살림을 주무르는 기획재정부 예산실장과 2차관, 정부 정책을 총감독하는 국무조정실장까지 요직을 꿰찼던 그가 공직을 떠난 지도 2년이 다 돼간다. 지난해 2월 아주대 총장으로 취임한 그는 어느덧 청년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의 굽이마다 바늘구멍을 뚫고 전진해 결국 ‘성공’한 그가 취업난 등 아픔에 허덕이는 청년들에게 건네는 말은 무엇일까. 김 총장은 “기성세대가 ‘나도 젊을 때 힘들었다’고 하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그보다 훨씬 힘들다”고 첫마디를 꺼냈다. “나 때는 상고를 나와서 은행에라도 갔다. 지금 학생들이 느끼는 고민은 단순히 취업과 진로에 대한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와 교육이 학생들에게 정답만 찾도록 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답이 아니면 다 오답이라고 가르치는 기성세대가 반성해야 한다”며 “청년뿐 아니라 일반 대중의 내연화한 분노를 해소하지 않으면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버금가는 또 다른 형태의 위기가 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11일 김 총장의 성품만큼이나 단출한 아주대 총장실에서 ‘개천의 용’을 상징하는 그에게 청년 문제의 해법을 물었다. /대담=이연선 경제부 차장 bluedash@sedaily.com
-관료에서 교육자로 변신했다. 교육현장에 오니까 어떤가.
△젊은 사람이랑 같이 일하는 게 좋다. 올 때도 젊은이들의 바다에 빠져보자는 생각에 왔다. 전에 몰랐던 젊은이들의 고민도 보이고, 잠재된 청년정신도 보인다. 나한테는 새로운 자산이다.
지금 젊은이들 많이 힘들다. 기성세대가 “내가 젊었을 때도 힘들었어”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단순히 취업이나 진로 문제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고민이 훨씬 깊다. ‘취업이 왜 힘들까’라는 질문에 노력이 부족해서, 좋은 학교 못 나와서, 스펙이 짧아서라는 답을 찾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우리 사회가 학생들에게 정답을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학생이 가야 하는 길의 트랙은 정해져 있고, 정답을 찾아야 하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문제집을 뒤집어보면 뒤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 때 풀었던 문제를 대기업 취업할 때까지도 푼다. 내용은 다르겠지만 정답을 찾는다는 패턴은 똑같다. 정답이 아니면 오답이다. 학생들이 거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좋은 대학을 가야 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몇 종의 스펙을 갖춰야 하는지 등등을 고민하고 있는 거다. 나는 정답이 아니라 자기 답을 찾으라고 학생들에게 말한다. 취업이나 진로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부딪히게 된다. 우리 사회가 학생들이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패기가 부족하다고 한다.
△내가 지난해 1년 동안 학생을 8,000명 만났다. 2주일에 한 번씩 브라운 백 미팅(간단한 점심 식사 모임)도 하고, 총장 북클럽을 만들어 매달 20명과 책 한 권을 정해서 읽고 토론한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는 1,000명이 넘는 학생에게 빵과 우유도 나눠준다. 그냥 나눠주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학생에게는 눈을 맞추라고 하고, 손에 힘이 없으면 손에 힘을 주라고 한다. 눈높이를 낮춰서 진심을 들어보면 학생들이 (기성세대 생각처럼) 그렇지 않다. 지금 학생들도 우리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 있었던, 그 청춘이 있다. 다만 잠재돼 있는데 우리 사회와 학교, 그리고 기성세대가 그게 발현되는 것을 막고 있다.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을 학교에서 만들어주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우선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상이 잘못됐다. 이제는 4차산업인데 이건 제품이나 기술에 지능을 얹는 것이다. 두 가지 요구되는 게 있다. 첫 번째는 상상력이고, 두 번째는 융합이다. 만보기는 예전에도 있었다. 여기에 지능을 얹으니까 칼로리 소비량을 측정하고 예측한다. 걷는 속도도 나오고 혈압이나 맥박도 다 알 수 있다. 웨어러블로 만들어 규칙적인 운동이 모니터링되면 보험사에서 보험료도 깎아준다. 미국의 한 기저귀 육아용품 회사에서 노부부와 여고생밖에 없는 집에 기저귀 용품을 보냈다. 그 여학생의 쇼핑 습관을 모니터링해보니 향기나는 것을 찾다가 향기 안 나는 것을 찾는 걸로 임신했다고 추측했는데 실제로 맞췄다. 바코드는 기술 인프라지만 그것을 상상력과 결부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 상상력을 키우고 조금은 엉뚱한 사람도 나오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세상에서는 지금처럼 정답을 찾는 패턴은 맞지 않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가.
△무엇보다 기득권 카르텔을 깨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모두 뛰고 있다. 자기 이익이 침해되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그런 덧셈의 합이 우리 사회에 바람직하지 않는 답으로 많이 나온다. 기득권 카르텔 안에 있는 사람들이 더 심하다. 기성세대들이 그물코를 촘촘하게 만들었다. 인재를 키우거나 길러내는 것도 이런 것이 바탕이 된 사회 보상 체계의 산물이다. 사람도 합리적인 존재라 그런 사회 보상 체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성적인지 잘 안다. 그래서 정답을 찾는 것이고, 명문대를 가고, 스펙을 쌓는 거다. 그 고리를 깨지 않으면 어려워진다.
-중요한 것은 깨는 방법인데.
△어려운 문제다. 첫 번째는 있는 사람, 가진 사람, 더 배운 사람이 자기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려놓는 게 희생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게 우리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있는 사람, 가진 사람, 더 배운 사람들이 가진 것을 위협받게 된다. 두 번째는 고착화한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양극화가 고착화했다는 증거가 ‘소셜 모빌리티(social mobility)’다. 이전에는 계층 이동이나 사회적 이동이 교육을 통해서 가능했다. 지금은 거꾸로 교육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는 수단이 됐다. 200~300년 전에는 이러면 세상이 뒤집어졌다. 앞으로 나올 새로운 형태의 혁명은 과거보다 훨씬 심각한 경제위기의 모양을 띨 것이다. 이런 문제가 고착화하면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어떤 형태로든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열풍도 보여주지만 전 세계적으로 사회갈등이 심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내연화하고 있다. 어느 순간 ‘티핑포인트(어떤 현상이 폭발적으로 번지는 순간)’를 지나면 폭발한다. 소위 ‘갑질’에 대한 우리 사회 수많은 을의 분노 표출도 바로 기득권 카르텔에 대한 잠재된 분노다. 문제는 이 잠재된 분노가 경제의 구조적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총수요를 끌어내리고 청년실업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사회경제 속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구조적 문제, 즉 기득권 카르텔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두 번의 경제위기에서 ‘코스메틱’한 변화, 즉 화장 분칠만 했다. 문제가 안에서 점점 더 내연화해서 더 큰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폭발하지 않으면 모른다.
-정권마다 비전 제시는 많았다.
△비전 제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적 합의다. 다른 생각이 있으면 소통하고 토론해야 하고, 우리에게 어떤 제약 요인이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 그게 독일과 네덜란드, 북유럽 일부 국가들이 했던 사회적 합의였다. 우리는 그게 쉽지 않다. 가진 사람이 먼저 내려놓는 것이 사회적 합의의 전제조건이다.
-대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뭔가.
△오는 2023년 고등학교 졸업자가 대학 정원보다 16만명 적다. 대학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외부적 유인에 의해 대학이 구조적으로 바뀐다고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오늘날 대학의 가장 큰 위기는 대학이 대학답지 않다는 것이다. 외형적인 문제를 대증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대학 스스로 근본적으로 바뀔 생각을 심각하게 해야 한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기보다 작은 것부터 변화해야 한다.
-총장님이 아주대 1학년 새내기라면 지금도 금융회사에 취직하거나 관료가 될까.
△금융회사로 다시 안 간다. 공무원도 안 할 것 같다. 대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빡세게’ 찾을 것이다. 창업을 해볼 수도 있다. 창업했다가 장렬하게 실패를 해보고 있지 않을까.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약력 △1957년 충북 음성 △1975년 덕수상고 △1982년 국제대 법학과 △1988년 서울대 행정학석사 △1993년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박사 △1982년 행정고시(26회), 입법고시(6회) △1983년 경제기획원 사무관 △1995년 재정경제원 과장 △2002년 세계은행(IBRD) 프로젝트 매니저 △2007년 기획예산처 재정정책기획관 △2008년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 △2010년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2012년 기획재정부 차관 △2013년 국무조정실장(장관급) △2015년~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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