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적당한 시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하기에 어려운 시기는 있는것 같습니다.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이 끝난 후라든지,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육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든지, 일이 너무 바빠서 물리적으로 연애를 할 수 없을 때, 마음은 꽁꽁 닫히기 쉽죠. 그런데 <어느 멋진날>(1996년작, 마이클 호프만 감독)의 주인공들을 보면 꼭 그런것도 아닌가봅니다. 위의 조건을 두루 갖췄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를 총으로 쏴달라”는 과격한 선언을 하고도 사랑에 빠지니말입니다.
완벽주의자 멜라니 파커(미쉘 파이퍼)는 이혼 후 아들 알렉스를 키우며 살아가는 직장여성입니다. ‘특종중독자’인 유능한 기자 잭 테일러(죠지 클루니)도 이혼남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잭의 전부인이 신혼여행을 가면서 딸 매기를 맡깁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알렉스와 매기는 잭의 실수로 소풍을 가지 못하게 되면서 졸지에 하루종일 아이를 봐야하는 사단이 벌어집니다.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 멜라니 입장에서는 잭이 원망스러우니 말이 곱게 나가질 않고 잭도 날카로운 멜라니가 피곤하기만합니다. 게다가 핸드폰까지 바뀌면서 업무에 차질이 생기자 두 사람은 계속 싸우지만 오후부터는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찾습니다. 서로 번갈아가며 아이들을 맡기로 한거죠. 하지만, 멜라니는 매기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매사 잭을 몰아쳐놓고 엄청난 실수를 했으니 후회와 미안함으로 폭풍 눈물을 흘리지만, 이 사건을 통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행히, 잭이 매기를 찾아내고 멜라니도 시장과 마피아의 검은거래를 특종으로 썼다 역풍을 맞은 잭을 돕기 위해 애를 쓰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게 되고 조금씩 마음이 열립니다. 아이들의 축구경기장에 나타난 멜라니의 전남편으로 인해 잭이 잠깐 위축되기도하지만, 결국 밤늦게 딸을 앞세워 그녀의 집으로 갑니다. 뭔가 허전했던 멜라니도 뜻밖의 반가운 손님에 얼굴이 환해집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또 싸웁니다. 니가 먼저 좋아했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하면서요. 그래봤자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속이지못합니다. 하루종일 내렸던 비도 두사람의 해피엔딩을 상징하듯 멈췄습니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갑자기 아이를 맡길 곳이 없을 때, 얼마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지 잘 알겁니다. 중요한 고객이 제안한 회의 겸 저녁식사와 아이와 놀아주기로 한 약속이 겹쳤을 때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갈등과 어떤 것을 선택해도 남는 후회. 영화는 이렇게 일과 육아의 벼랑끝에서 아슬아슬 버티며 살고 있는 싱글남녀의 어려움을 잘 그려냈습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멜라니와 무심하고 예의없어 보이는 잭이지만 사실은 책임감 강하고 여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니 ‘네 남자를 아이처럼 사랑한다면 멋진 남자가 될 것이다’ 영화 속 자주 등장하는 대사처럼 사랑을 통해 앞으로 더 멋진 부모, 직장인이 될겁니다. 아무 걸리는게 없는 청춘들의 사랑도 이쁘고 부럽지만, 멜라니와 잭처럼 삶의 무게를 가득 짊어진 아줌마아저씨의 사랑이야말로 눈물겹게 아름답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단단히 현실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응원해주고싶습니다. 아이 때문에, 주변의 시선 때문에 사랑 앞에서 고민이 많은 싱글 남녀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사랑말고 인생에서 뭣이 중하겠습니까.
KBS 1라디오 <함께하는 저녁길 정은아입니다>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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