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4월 6일, 러시아제국 서남부 도시 키시네프(Kishinev). 시민들이 한순간에 광기에 휩싸였다. 폭도로 변한 이들은 특정 민족을 보는 대로 공격했다. 경찰과 군대, 정부 관리의 수수방관 속에서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관동대지진(1923년) 당시의 조선인 대학살을 연상케 하지만 발생시점이 20년 빠른 이 사건은 키시네프 포그롬(Kishinev pogrom). 학살 대상인 특정 민족은 유대인이었다. 포그롬이라는 단어 자체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19세기 말부터 등장한 포그롬은 수 없이 반복되며 영어와 불어, 독일어 사전에도 올랐다.
역사에 ‘키시네프 학살(kishinev massacre)’로도 기록된 이 사건의 발단은 악의성 오보. 러시아 극우 민족주의 신문들이 오리무중에 빠진 6세 아동 살해사건의 범인이 유대인으로 추정된다는 기사를 내보내자 키시네프시가 흥분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흘간 계속된 폭동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49명(뉴욕타임스는 12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내보내었다). 592명이 중경상을 입고 가옥 700여채가 불탔다.
악의적인 선동과 광란의 학살에는 세 가지 배경이 깔려 있었다. 첫째 러시아 제국 전역에 유대인 수가 갑작스레 많아졌다. 1772년부터 1795년까지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리투아니아연합을 세 차례에 걸쳐 나눈 결과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이 갑자기 러시아제국 신민(臣民)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두 번째 이유는 질시. 기존 유대인과 합쳐 350만명의 유대인을 떠 안게 된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600개가 넘는 유대인 관련 법령을 만들며 거주와 직업을 제한했지만 유대인 인구를 빠르게 증가하고 상권도 커졌다. ‘예수를 팔아먹은 유대인’들이 자신들보다 잘사는 모습에 러시아인들의 증오가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였다.
세 번째는 종교와 광기의 결합. 3월과 4월 내내 러시아 정교의 부활절과 유대교 절기인 유월절이 겹친 가운데, 러시아인 사이에서는 유대인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기독교인을 제물로 바친다는 루머가 퍼졌다. 부활절 직전까지 40일 금식이 끝나 심리적 해방감에서 갖은 음식과 술을 만끽한 러시아인들은 ‘거룩한 종교 행위’처럼 유대인들을 죽였다.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얼마 뒤 소년을 죽인 진짜 범인은 친척으로 밝혀졌으나 반성은 전혀 없었다. 사법당국의 뒷처리도 미진해 주모자 2명에게 각각 7년형과 5년형, 22명에게 1~2년의 징역형이 내려졌을 뿐이다. 솜방망이 처벌 속에 비슷한 사건이 꼬리를 물고 되레 반(反)유대 정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다.
키시네프 포그롬은 유대인 박해 사례의 하나로 끝나지 않고 20세기 역사에 파장을 미쳤다. 유대인 사회는 포그롬이 반복되는 러시아 땅은 살 곳이 못 된다는 판단 아래 주로 미국으로 터전을 옮겼다. 이렇게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 약 250만명. 당연히 미국 유대인 사회가 급격하게 컸다. 이전까지 서로 반목하던 유대인끼리도 국제적 연대 의식이 싹텄다.
미국과 서구 각국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동구권 유대인들의 박해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이주를 도왔다. 러시아의 동화정책에 순응해 ‘애국적 러시아인’으로 변신하려던 지식인 그룹들은 ‘유대 독립 국가’를 세우는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다는 초기 시오니즘 운동의 씨가 키시네프 포그롬을 통해 뿌려진 것이다.
대서양을 건넌 유대인들은 금융과 언론을 장악해 나가며 미국 사회의 중추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에 남은 유대인들은 유대에 동정적인 러시아 지식인들과 함께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점차 사회주의에 빠져들었다.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를 세운 공산 혁명인 러시아 혁명에 유대인들이 다수 포진한 것도 포그롬의 소산이다.
한반도의 역사도 영향을 받았다. 동포의 학살 소식에 가슴을 쳤던 독일 출신의 미국의 유대인 자본가 제이콥 시프는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을 적극 편들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의 전비 조달을 위해 발행한 2억 달러(요즘 가치 240억 달러·비숙련공 임금상승률 기준) 규모의 국채를 전액 지급 보증해 러일전쟁 승리를 재정적으로 도왔다.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황궁에 초청돼 훈장을 받았다.
113년 전, 유대인의 피로 물들었던 키시네프는 몰도바 공화국의 수도 키시너우로 이름이 변경됐지만 증오와 광기, 학살의 인자는 변하지 않았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로 바뀐 채 팔레스타인은 차별과 증오, 복수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진실을 왜곡하는 악의적 보도가 판치고 마치 미친 듯 돌아가는 세상이니.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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