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페이퍼스’로 명명된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사상 최대 규모 조세회피 자료 폭로의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자료에 이름이 포함된 현직 정상급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분노로 퇴진 압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HSBC·소시에테제네랄(SG) 등 조세회피를 도운 글로벌 은행들은 ‘탐욕스러운 자본’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AP통신에 따르면 4일(현지시간)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의회 앞에 경찰 추산 8,000명이 넘는 시위대가 몰려 시그뮌뒤르 다비드 귄뢰이그손 아이슬란드 총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인구 33만명의 아이슬란드에서 이 정도 시위대가 모인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귄뢰이그손 총리는 그동안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윈트리스’라는 회사를 세워 재산을 은닉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며 이번 폭로로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났다. 아이슬란드 야권은 그에게 자진사퇴를 하거나 의회에서 불신임투표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귄뢰이그손 총리는 “현 정부가 일을 잘 끝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번 일로 사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급진당 등 야당이 대통령 비리조사를 위한 의회 특별위원회 구성과 탄핵절차를 추진하기로 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자산신고, 납세, 이해관계 충돌에 관해 국내·국제법령을 완벽하게 따르는 첫 지도자”라고 해명했지만 부패척결 등 국가개혁을 내세우고 당선된 대통령인 만큼 만만치 않은 정치적 후폭풍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말 기업가 출신으로 집권에 성공한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역시 바하마에 설립한 법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라는 반대파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정치·경제 엘리트들과 결탁해 탈세를 도우며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 은행들에도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영국 HSBC와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 스위스 양대은행인 UBS와 크레디트스위스(CS), 프랑스 SG 등 세계적 은행들이 계열사들을 통해 이러한 행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은 금융권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ICIJ는 500여개 은행이 고객들의 요청으로 유령회사 1만5,600여개를 설립했으며 이 중 HSBC 계열사들이 2,300여개의 회사를 만들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밝혔다. 호세 우가스 국제투명성기구(TI) 의장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은행, 법률가, 금융 전문가들이 부패한 돈을 숨기기 위해 비밀회사를 만들고 있는 국제금융 시스템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한편 미국·프랑스·독일·호주·스웨덴·브라질 등 각국 수사기관 및 금융당국은 파나마 페이퍼스 폭로 직후 방대한 의혹을 검증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역외회사를 설립해 자금을 보유한 행위 자체는 합법이지만 조세포탈, 돈세탁, 경제제재 대상국과의 금융거래 등 다른 범죄와 연루됐을 가능성이 큰 만큼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피터 카 미 법무부 대변인은 이날 “법무부 차원에서 해당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다”며 “미국인이나 미국 금융 시스템과 연계됐을 수도 있는 모든 고위급 인사와 외국인의 부패 의혹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연유진기자 economicu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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