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장모(21)씨는 게임을 그만 하라며 질책하는 아버지를 집안에 있던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아버지에게 입에 담기도 어려운 몹쓸 짓을 한 데는 그간 앓아왔던 ‘우울증’이 원흉이 됐다.
#최모(37)씨는 일곱 살 아들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한 뒤 이도 모자라 시신까지 훼손한 인면수심의 범행을 저질렀다. 부천 아동 학대·유기 사건의 이면에는 자신의 분노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분노·충동조절 장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모의 무관심과 잘못된 양육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자기 아들에게 모진 학대를 가했던 최씨는 어느 누구와도 자신의 문제를 상의하지 않고 스스로를 사회적·심리적으로 고립시키며 짐승이 돼버렸다.
국민 정신건강에 ‘빨간불’이 켜졌다. 성인 10명 중 3명은 평생 살면서 한 번은 우울증 및 분노·충동조절 장애 등 정신질환을 겪는 등 정서적 빈곤을 겪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개인 문제로 그치지 않고 때때로 각종 범죄를 부추기는 뇌관이 되면서 정신질환은 국가적 문제로까지 자리 잡게 됐다. 뇌와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은 넘쳐나지만 정작 이들 대다수는 본인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인색하다. 정신질환을 겪은 사람의 15.3%(보건복지부 2011년 조사)만이 의료기관을 찾아 적극적인 치료에 나설 뿐이다.
◇갈수록 단절되는 네트워크, 정신이 메말라간다=보건복지부가 지난 2011년 18세 이상 74세 이하 성인을 대상으로 ‘정신질환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약 30%가 평생 한 번 이상의 정신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적잖은 이들의 정신건강이 크고 작은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말이다. 각계 전문가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온라인·모바일상의 열린 소통과 달리 오프라인상 ‘진짜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네트워크 단절을 정신이 메말라가는 주원인으로 꼽았다. 정신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황에 이르렀지만 이를 감싸고 치유할 사회적 기능은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점차 자신을 고립시키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가 전투 같은 극한 경쟁도 국민 정서를 빈곤하게 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이 같은 요인은 우울증, 분노·충동조절 장애, 불안 장애 등 현대적 정신질환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근거 없는 두려움에 휩싸인 불안 장애 경험 환자는 전체 인구의 25%에 달한다. 분노·충동조절 장애로 진단받은 환자(건강보험공단 집계)만 2011년 3,030명에서 지난해 3,614명으로 해마다 증가세다.
특히 은퇴와 맞물린 50대 베이비붐세대는 정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꼽힌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부쩍 50대 환자 수가 증가했다”며 “이들 대다수는 평생 일 외에 자신의 자아를 표현할 만한 것이 없고 이제껏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방법을 모르며 살았던 이들”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은퇴를 목전에 둔 오늘날 50대 상당수가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모르고 정서적 빈곤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되는 정신적 취약층인 만큼 앞으로 이들을 고립되지 않게 밖으로 이끌어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은 국가적 문제, 각종 범죄 부추기는 뇌관 되기도=개인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게 되면 이는 곧 갖가지 사회 문제를 폭발시키는 뇌관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일례로 2013년부터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충동조절 장애는 적잖은 ‘분노 범죄’를 만들고 있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4년 전체 폭력범죄 39만1,000여건 가운데 ‘우발적 동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42.5%나 됐다. 우발적 동기에 의한 폭력범죄는 2011년 이후 40% 이상을 꾸준히 웃돌고 있다. 순간의 충동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주로 자신보다 약자를 상대로 억눌린 감정을 그릇된 방법으로 발산하는 것이다. 권일용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경감은 “최근 5년 전부터 한국사회 범죄 트렌드로 ‘묻지마 범행’ 등 충동범죄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며 “분노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직접 대면해보면 대부분 ‘너마저 나를 무시하느냐’는 자존감 훼손이 공통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용민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를 참았을 때 겪어야 하는 심리적 불안과 우울, 고통스러운 감정을 견뎌낼 수 없어 (약자를 상대로) 폭발한 것”이라며 “이는 무력한 자신을 권력을 행사하는 자신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그릇된 몸부림”이라고 말했다.
방치된 정신질환이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회 문제의 씨앗으로 심심찮게 등장하는 만큼 분노가 다시금 범죄로 재발하지 않을 치료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오은경 대한변호사협회 사무차장은 “국내에는 아직 분노조절 장애와 연관된 범죄자에게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제도가 운용되지 않고 있다”며 “형사처벌 외에 치료 프로그램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자 모두 범죄 위험군 아냐, 사회 격리·배제보다 포용 필요=국민의 정신건강 악화가 개인뿐 아니라 사회 문제로 전이되면서 이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만도 연간 8조3,000억원에 달하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정부도 국민 정신건강 증진을 앞세우며 역량 강화에 나서고 있다. 2월 정부는 전문병원뿐 아니라 동네 내과나 가정의학과에서 우울증 등 정신질환 1차 진단과 상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신건강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또 정신과 외래진료시 환자 본인 부담률을 현재 30∼60%에서 20%로 낮추고 영유아·아동·청소년·청장년·노인 등 생애주기별로 심리상담과 종합검사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정신과 문턱을 낮춰 누구든 정서 빈곤을 느낄 때마다 발길을 돌리게 하겠다는 시도인 셈이다.
지난달 25일에는 ‘국립정신건강센터’도 문을 열었다. 그간 중증 정신질환자와 알코올 중독자 치료에 초점을 뒀던 국립서울병원이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것으로 ‘기분장애과’ 등 진료과를 신설해 앞으로 우울증·불안 장애 등 가벼운 정신질환까지 마치 동네 병원에서 감기 환자를 돌보듯 꼼꼼히 다루겠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정신건강기술개발사업 예산도 2014년 20억원, 지난해 60억원에 이어 올해 66억원으로 한층 강화했다. 만성 중증 정신질환자뿐만 아니라 일생에 한 번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모든 국민의 정신 장애를 보다 적극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막 정신건강에 관심을 두고 꽃망울을 맺은 만큼 꽃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정신질환을 바라보는 개개인의 인식 전환이 더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예전에는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을 분리·격리하는 게 주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이들을 어떻게 사회에 융화시키고 기여하게 만드느냐가 관건”이라며 “가령 분노조절 장애를 겪는 이들이 모두 범죄 위험군은 아닌 만큼 잘못된 선입견으로 이들을 사회에서 낙인찍고 배제하려 들기보다 포용하고 내면을 단련시키는 밑거름을 제공하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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